사진=한경DB
사진=한경DB
유통업체의 납품대금 지급기한이 짧아지면서 상품 매입과 현금 운용 방식에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중소 납품업체는 대금을 일찍 받아 원재료 구매와 생산에 투입할 여력이 커진다. 반면 정산기간을 길게 활용해온 유통업체는 상품이 팔리기 전에 지급해야 할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판매가 검증된 상품에 매입이 집중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직매입 대금 지급 60일→35일


7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지난달 1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은 직매입 납품대금 지급기한을 상품 수령일부터 60일에서 35일로 단축했다. 특약매입·위수탁·임대을 거래의 지급기한도 월 판매마감일부터 40일에서 20일로 줄였다. 개정안은 공포 후 1년이 지난 날부터 시행하도록 했다.

이번 개정은 티몬·위메프의 정산 지연 사태와 홈플러스 회생절차 등을 계기로 추진됐다. 유통업체의 자금 문제가 납품업체로 번지는 위험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공정위는 지난해부터 11개 업태, 111개 유통 브랜드의 대금 지급 실태를 조사했다. 직매입 지급기간은 업계 평균 27.8일이었지만 법정 상한에 가깝게 지급하는 일부 업체는 평균 53.2일이었다.

직매입은 유통업체가 상품을 사들여 판매와 재고 책임을 지는 거래다. 납품업체는 소비자에게 상품이 팔렸는지와 관계없이 약정한 대금을 받는다. 판매가 늦어져도 납품업체에 지급할 돈은 마련해야 하는 만큼, 정산기간이 짧아지면 유통업체의 운전자금 부담이 커질 수 있다.

유통사 현금 부담에 발주 축소 우려


쿠팡·다이소·컬리처럼 다양한 중소기업 상품을 취급하는 유통업체에서 주목할 부분도 이런 구조다. 거래처가 많다는 사실보다 상품을 매입한 뒤 판매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실제 지급주기가 영향을 좌우한다. 판매 속도가 느린 상품을 많이 보유하고 대금은 늦게 지급해온 업체일수록 재고와 자금 운용을 함께 조정할 필요가 있다.

납품업체에는 대금 회수가 빨라지는 효과가 기대된다. 제품을 생산해 납품하고도 돈을 기다려야 했던 기간이 줄면 원재료와 인건비 등에 쓸 자금을 확보하기 쉬워진다. 대출로 운영비를 충당하던 업체라면 이자 부담을 덜 가능성도 있다.

다만 유통업체가 자금 부담을 줄이려고 발주량을 조정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정된 매입 예산으로 현금을 빨리 회수하려면 판매량을 예측하기 쉬운 인기 상품을 우선할 수 있다는 논리다. 소비자에게 알려지는 데 시간이 필요한 중소 브랜드의 신제품이나 계절 상품은 매입 순위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다.

모든 직매입 대금이 일률적으로 25일 빨라지는 것도 아니다. 개정안은 월 1회 정산하는 거래에 대해 월말 매입마감일부터 20일 이내 지급할 수 있도록 예외를 뒀다. 월초에 납품받은 상품을 다음 달 20일에 지급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기업별 추가 자금 수요를 따질 때 실제 계약과 정산 방식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다.

中企 “빠른 정산보다 꾸준한 주문”

중소 납품업체 사이에서는 대금 회수가 빨라지는 것은 반갑지만 주문이 줄어들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원재료 구매와 인건비 등에 쓸 자금을 일찍 확보하더라도 유통업체가 매입 물량을 줄이면 매출 감소를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기 김포의 한 갈비탕·순댓국 제조업체 사장 서모씨는 유통업체의 발주 축소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는 "대금을 며칠 일찍 받는 것보다 주문이 10~20% 줄어드는 것이 더 큰 타격"이라며 "유통기한이 있는 식품은 주문이 줄면 남은 재고를 소진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신제품으로 판로를 넓혀온 제조업체도 긴장하고 있다. 한 벽지 제조업체 사장 김모씨는 "유통업체가 자금 부담을 느끼면 인지도가 낮은 중소기업 제품보다 판매량을 예측하기 쉬운 대기업 제품을 우선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개발을 거쳐 제품을 내놓더라도 소비자에게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중소기업에는 매입 기회가 줄어드는 것 자체가 부담이라는 설명이다.

한 세제 제조업체도 정산 속도뿐 아니라 주문이 안정적으로 이어지는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유통업체와의 협상력이 크지 않은 중소기업으로서는 발주량이나 거래 조건이 달라져도 대응하기 어렵다는 우려다.

이들 업체가 걱정하는 것은 한정된 매입 예산이 인기 상품에 집중되는 상황이다. 유통업체가 납품대금을 빨리 지급하면서 현금도 신속하게 회수하려면 판매 속도가 빠른 상품을 선호할 수 있다. 반면 신생 브랜드나 계절 상품은 판매 실적이 쌓이기 전에 매입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 있다는 게 업체들의 주장이다.
"돈 빨리 받으면 뭐하나"…쿠팡·다이소 납품업체들 '한숨' 나온 이유 [권용훈의 트렌드워치]
권용훈 기자 fac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