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는 한 명의 천재가 이룩한 우연이 아니다. 끊임없이 바통을 이어받는 예술가들의 도도한 흐름이 마침내 하나의 시대를 완성하는 법. 조성진과 임윤찬이 쏘아 올린 한국 피아니즘의 찬란한 불꽃은 또 다른 손길을 만나 더 널리 번져나가고 있다. 그 중심에 피아니스트 김세현(19)이 있다.
 4일 데뷔 앨범 ‘쇼팽, 포레’를 전 세계에 동시 발매한 피아니스트 김세현. /©김신중
4일 데뷔 앨범 ‘쇼팽, 포레’를 전 세계에 동시 발매한 피아니스트 김세현. /©김신중
김세현은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롱티보 국제 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당시 심사위원단이 ‘2위 없는 1위’를 선언하며 클래식계를 뒤흔들었다. 우승 이후 김세현은 프랑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파리의 개선문, 에펠탑,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등 파리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공간이 모두 그의 독주 무대가 됐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그에게 “터치가 우아하고 프레이징의 뉘앙스가 무한한 연주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파리를 매료시킨 김세현의 일상은 뜻밖에도 미국 보스턴에 닿아 있다. 그는 현재 보스턴 뉴잉글랜드음악원(NEC)에서 석사 과정을,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과정을 동시에 밟고 있다. 4일 데뷔 앨범 발매를 앞두고 화상 인터뷰와 기자간담회로 김세현을 만났다.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연주자답게, 그의 언어에선 비유와 은유가 자주 묻어났다.

파리에 바치는 음악 선물

김세현 "음악과 문학, 본질적으로 닮아…음표로 이야기를 전하는 거죠"
김세현의 첫 앨범 제목은 ‘쇼팽, 포레’다. 폴란드 출신인 쇼팽과 프랑스에서 태어난 포레는 파리에서 왕성한 작곡 활동을 했다. “쇼팽과 포레 모두 파리에 오래 살았어요. 포레의 음악은 쇼팽 없인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느낄 정도로 쇼팽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요. 제가 우승한 롱티보 콩쿠르도 파리에서 열렸죠. 저에겐 추억이 많은 곳인데, 두 작곡가에게도 특별한 도시였을 것 같아요. 파리가 저와 두 작곡가를 연결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앨범은 열두 곡으로 이뤄진 쇼팽의 ‘에튀드 작품번호 25’를 중심에 두고, 포레와 프랑스 샹송 가수 샤를 트르네의 곡을 더해 완성했다. 첫 곡인 포레의 ‘꿈을 꾼 후에’는 원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고, 마지막 곡인 ‘4월의 파리’는 트르네의 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했다. 파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다양한 음악적 풍경을 담아낸 이번 음반은 김세현의 섬세하고 낭만적인 프랑스풍 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김세현은 앨범의 중심축인 에튀드 작품번호 25를 준비하며 스승인 당타이선의 가르침을 되새겼다고 전했다. “선생님은 늘 쇼팽 에튀드를 연습곡처럼 치지 말고 전주곡을 치듯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 연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게 쇼팽 에튀드는 정말 시적이고 특별한 음악이에요. 특히 작품번호 25는 연주 내내 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들의 모음입니다.”

그는 에튀드 1번 ‘에올리안 하프’를 칠 때 어린 시절 학교 축제에서 솜사탕을 먹으며 보던 핑크빛 하늘을 떠올린다고 했다. ‘꿀벌’로 불리는 에튀드 2번을 연주할 땐 작고 빠른 모기를 상상한다고. 지난해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이어진 음반 녹음 과정에서 그는 깨달았다. 피아노를 친다는 건 결국 ‘듣는 것’이라는 것을.

에튀드 한 곡에 시 한 편

문학도이자 피아니스트인 김세현. 그의 손은 피아노 건반과 시를 쓰는 책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김신중
문학도이자 피아니스트인 김세현. 그의 손은 피아노 건반과 시를 쓰는 책상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김신중
김세현은 예원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해 보스턴 월넛힐예술고와 NEC 예비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선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최영미의 가르침을 받았고 현재 NEC 석사 과정에서 ‘쇼팽 스페셜리스트’ 당타이선과 NEC 피아노학과장인 백혜선을 사사하고 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하버드대 영문학과 재학 중’이 눈에 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음악과 문학은 본질적으로 유사한 장르라고 생각해요. 음악도 문학처럼 문장(프레이즈)이 있어요. 수많은 음표와 프레이즈에서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지가 보이죠. 문학이 수많은 단어와 문장을 쌓아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게 있는 것처럼요. 둘 다 스토리텔링을 하는 거죠. 문학 공부는 피아니스트의 곡 해석에 여러모로 영감을 줍니다.”

김세현은 곡의 감상을 담은 짧은 시를 직접 짓기도 한다. 쇼팽의 에튀드 한 곡마다 세 줄짜리 하이쿠(일본의 짧은 정형시)를 영문으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에튀드를 연주할 때 하이쿠를 다시 찾아보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기존 틀에서 벗어나 그날그날의 상황과 영감에 따라 연주해요.”

내년 정명훈과 도쿄·파리로

내년까지 그의 달력은 국내외 연주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달만 해도 대구(9월 5일)와 서울(9월 6일)에서 데뷔 앨범 발매를 기념한 첫 리사이틀이 이어진다. 10월에는 파리, 11월에는 보스턴 조던홀 무대가 예정돼 있다.

19세의 피아니스트에게도 잦은 장거리 비행은 고된 일이다. 연습과 연주가 일상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지만, 가장 편안한 시간은 보스턴 집에서 쉴 때라고. 또래들처럼 알리오올리오, 카르보나라 등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유튜브로 축구 영상을 본다. 클래식 외에 악뮤(AKMU), 잔나비, 이문세, 김광석 등 ‘가사가 좋은’ 대중음악도 즐겨 듣는다.

김세현은 마에스트로 정명훈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지난달 정명훈 음악감독이 이끄는 KBS교향악단과 협연한 그는 내년에는 정 감독 지휘의 도쿄필하모닉,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과도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정명훈 선생님과 함께하는 무대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지휘를 한다기보다 제 옆에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에게서 느껴지는 응축된 에너지는 고결하면서도 자유로운 어떤 것이에요. 그 에너지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곡가 비추는 연주자 될 것

김세현은 서정적이고 감수성이 두드러지는 작곡가의 곡을 주로 연주했고, 잘 어울린다는 평을 받는다. 하지만 특정한 스타일을 추구하기보다 ‘음악을 드높이는 연주를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가 말했듯, 주인공은 음악이지 연주자가 아니에요. 연주자는 본인을 드러내기보다 작곡가와 음악을 빛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한 연주는 인공적이에요. 앞으로도 음악을 섬기는 마음으로 공부할 거예요.”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소리’ 그 자체다. “소리를 어떻게 내야 하는지, 소리 자체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소리가 늘 아름다울 필요는 없어요. 고통을 표현할 때는 아름답지만 고통이 담긴 소리여야 하죠. 음악은 결국 음과 음, 그 사이(여백)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조민선/허세민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