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으로 기관투자가의 수탁자책임과 주주활동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을 만나 ‘침묵의 비용’이 가져올 변화와 5%룰·주총 제도 개선 과제, 자본배분과 이행점검을 중심으로 한 스튜어드십 코드의 실효성 조건을 짚어봤다.
[한경ESG] 스튜어드십코드 2.0, 한국 자본시장 변화는 ② <인터뷰1>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업을 규율하는 제도가 아니라 기관투자자를 규율하는 제도다. 다만 기관투자자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결과가 기업에 대한 압박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채원 라이프자산운용 이사회 의장은 10년 만에 전면 개정된 한국 스튜어드십 코드의 본질을 이같이 설명했다. 1988년 증권업계에 입문해 동원증권, 동원투자신탁운용, 한국투자증권 등을 거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대표를 지낸 이 의장은 국내 가치투자 1세대를 대표하며 지난 38년간 한국 자본시장의 현장을 지켜봤다.
그가 바라본 개정 스튜어드십 코드의 핵심은 기관투자자가 형식적인 코드 가입이나 정책 공개를 넘어 실제로 어떤 수탁자 책임 활동을 했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단계로 넘어갔다는 점이다. 투자 기업의 문제를 알고도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그 이유까지 설명해야 하는, 이른바 ‘침묵의 비용’이 생긴 셈이다. 이에 따라 기업에 대한 서한 발송과 대화 요청은 물론 주주제안과 기관투자자 간 협력적 관여 등 수탁자 책임 활동의 강도와 범위도 한층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5%룰·주총 정보 제공기간’…발목 잡는 제도적 걸림돌 해소 급선무
다만 이 의장은 코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기관투자자의 발목을 잡는 제도적 걸림돌도 함께 해소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정상적인 주주활동을 ‘공동보유’로 묶어 규제할 수 있는 대량보유보고제도, 이른바 ‘5%룰’을 대표적인 과제로 꼽았다.
개정 코드가 기관투자자 간 ‘협력적 관여’를 수탁자 책임 활동의 주요 수단으로 제시한 만큼, 이를 뒷받침할 법적 환경도 함께 정비돼야 한다는 게 이 의장의 지적이다. 여러 기관이 특정 안건에 공동으로 의견을 내는 행위가 5%룰상 공동보유로 해석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면 적극적인 주주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의장은 “경영권을 함께 취득하려는 행위와 특정 안건 하나에 대해 일회성으로 의견을 모으는 것은 구분할 필요가 있다”며 “기관끼리 특정 안건에 대해 ‘같이 반대하자’는 이야기조차 부담스러운 구조라면 협력적 관여가 활성화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특정 안건에 대한 일회성 공동의사결정은 공동보유 판단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최근 국회 입법 논의와도 맞물리고 있다. 박홍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8월 기관투자자와 공적연기금의 주주활동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5%룰상 불확실성을 줄이는 내용의 자본시장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했다. 정상적인 의결권 대리행사 과정과 공적연기금의 일정한 주주활동에 대해 기존 규제 적용 범위를 보다 명확히 하는 것이 핵심이다.
다만 법안은 아직 국회 심사 단계다. 최종 통과 여부와 구체적인 적용 범위는 향후 논의 과정에서 달라질 수 있다. 이 의장은 “코드에서 공동 관여를 강조하면서 관련 법에서는 이를 사실상 어렵게 만드는 부분이 남아 있다면 제도의 취지가 제대로 구현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또 다른 과제는 기관투자자가 주주총회 안건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현행 제도상 주총 소집통지는 주총 개최 2주 전에 이뤄지고,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 등 핵심 자료는 이보다 더 임박해 제공될 수 있다. 기관투자자 입장에서는 정기주총 시즌에 수십~수백 개 투자기업의 이사 선임과 정관 변경, 보수, 자본정책 등 수많은 안건을 짧은 기간에 한꺼번에 분석해야 한다.
이 의장은 “주총 소집통지가 2주 전에 나오고 사업보고서나 감사보고서가 더 늦게 나오면 실제로 검토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기관에 책임 있는 의결권 행사를 요구한다면 판단할 시간을 먼저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적어도 지금보다 훨씬 이른 시점, 가능하다면 4주가량의 검토기간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이 역시 국회에서 후속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일정 규모 이상 상장회사의 주총 소집통지·공고 시점을 현행 2주 전에서 4주 전으로 앞당기는 상법 개정안이 발의된 상태다. 주주와 기관투자자가 안건을 검토하고 의결권 행사 방향을 정할 시간을 늘리려는 취지다.
다만 이 의장은 단순히 소집통지 시점만 앞당겨서는 실효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의결권 판단의 핵심 자료인 사업보고서와 감사보고서 역시 충분한 검토시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함께 제공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기관투자자에게 왜 찬성했고, 반대했는지 설명하라고 하면서 정작 판단 자료를 충분히 검토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 결국 형식적인 의결권 행사만 늘어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배당보다 자본배분이 먼저”… 2027년 주총이 첫 시험대
이 의장은 스튜어드십 활동이 배당 확대나 자사주 소각을 요구하는 주주행동주의로만 흘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기관투자자의 기업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거버넌스와 지속가능한 사업모델, 자본배분이다. 기업이 자신의 자본비용을 알고 있는지, 투자자본이익률이 이를 웃도는지, 수익성이 낮은 사업에서 자본을 회수해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는 분야로 옮기고 있는지를 먼저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의장은 “배당과 자사주 소각은 자본배분의 결과이지 전략 그 자체가 아니다”며 “자본비용보다 높은 수익을 낼 투자처가 있다면 기업이 그곳에 투자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반대로 투자할 곳이 없고 현금만 계속 쌓인다면 주주환원을 선택해야 한다고 봤다. 기관투자자가 기업을 평가하는 순서도 ‘거버넌스→지속가능한 성장→효율적인 자본배분→주주환원’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기관투자자가 봐야 할 것은 배당률이나 자사주 소각 규모 자체가 아니라 기업이 자본을 어디에, 어떤 근거로 배치하고 있는지다. 이 과정에서 이사회의 역할과 의사결정 기록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특정 투자나 계열사 거래, 합병·분할, 자본조달을 왜 선택했는지, 어떤 대안을 검토했는지가 기록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는 “앞으로는 의사결정 결과 자체보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가 더 중요해질 수 있다”며 “기관투자자도 회사가 어떤 판단을 내렸는지보다 그 판단의 근거와 과정이 합리적이었는지를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이 스스로 제시한 밸류업 목표도 기관투자자의 새로운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봤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사실보다 왜 달성하지 못했는지, 계획이 바뀌었다면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일관되게 설명하는 능력이 중요해진다는 설명이다. 그는 “앞으로는 단순히 대주주가 지분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보다 왜 이 투자를 했고, 왜 이 자산을 보유하며, 왜 이 사람을 이사 후보로 추천했는지를 주주에게 설명할 수 있는지가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장은 개정 스튜어드십 코드가 자본시장의 ‘게임 체인저’가 될 가능성에는 조건을 달았다. 가장 경계한 것은 이행점검의 형식화다. 기업 방문 횟수나 주주서한 발송 건수, 반대표 행사 횟수 같은 숫자만으로 기관의 이행 수준을 평가하면 오히려 고객의 장기수익보다 평가점수를 얻기 위한 ‘보여주기식 관여’가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관투자자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며 “고객과 수익자의 장기적인 이익을 위해 어떤 판단을 했고, 그 결과 기업가치가 실제로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개정 코드의 성패는 스튜어드십 코드 자체보다 이를 둘러싼 제도들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느냐에 달려 있다. 상법 개정은 주주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를 넓히고, 밸류업 공시는 기업이 스스로 목표를 제시하게 하며,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자가 그 목표의 이행 여부를 점검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의장은 “코드만 바꿔놓는다고 시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5%룰과 주총 제도, 이행점검 방식까지 함께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기관투자자가 고객의 돈을 맡은 투자자로서 기업에 제대로 질문하고, 기업은 그 질문에 설득력 있게 답하며, 자본이 더 생산적인 곳으로 움직이는 구조가 만들어져야 스튜어드십 코드 개정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