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정부 불통으로 되살아날 뻔한 '대출 종이 문서'
15년 전만 해도 주택담보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을 받으려면 동사무소(현 주민센터)에 가서 가족관계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등을 발급받아 은행을 방문해야 했다. 요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온라인에서 원하는 정보를 추출·수집하는 ‘스크래핑’ 기술이 발달하면서 비대면으로 한 번에 서류 제출이 가능해져서다.

이런 편리함이 갑자기 사라질 뻔했다. 개정된 개인정보보호법 시행령에 따라 오는 20일부터는 대법원, 정부24 등 공공기관 사이트에서 스크래핑을 사용하려면 기업과 공공기관이 사전 협의하도록 규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법 위반을 우려해 아예 스크래핑을 완전 차단하기로 했다. 법원 서류가 다수 필요한 비대면 대출이 막힐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부랴부랴 대법원을 설득했다. 결국 대법원이 한시적 유예 조치를 통해 한발 물러서며 급한 불을 껐다.

정부는 스크래핑 기술을 마이데이터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 방식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스크래핑은 프로그램이 불필요하거나 민감한 정보까지 수집할 위험이 있는 데 비해 마이데이터 API는 규정된 정보만 전송하도록 돼 있어 유출 위험성이 낮기 때문이다.

더 안전한 기술로 나아가는 방향 자체는 타당하다. 문제는 정부의 대응과 소통 방식이다. 개인정보보호위는 지난해 6월부터 제도 개편을 예고했고 개정 시행령을 지난 2월 공포했다. 그러나 API 전환이라는 목표만 정했을 뿐 공공기관과 금융회사는 각각 어떤 데이터를 API로 제공할지 구체적 방식을 정리하지 못했다. 명확한 지침과 감독이 없자 API 구축 작업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개인정보보호위는 시행령 시행을 불과 열흘 앞둔 이달 11일에야 공공기관과 사전 협의를 신청하면 기존 방식을 한시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했다. 앞선 두 차례 접수에서만 약 700명의 신청자가 몰렸다. 당국이 업계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한 채 법 시행만 밀어붙였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금융권에서는 스크래핑을 완전히 대체하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대출 관련 정책이 계속 바뀌는 만큼 정해진 정보만 제공하는 API 기술은 한계가 뚜렷하다는 것이다. API만 강제한다면 오히려 소비자의 불편함만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API라는 새 도로를 완성하지 않고 기존 도로부터 막으면 소비자만 서류 떼러 관공서를 다녀야 하는 피해를 본다. 정부의 명확한 지침이 없다면 이런 혼란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정부는 보안 강화라는 목표에 매몰돼 소비자 편의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