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의약품 수탁개발생산기업(CDMO)이 생산 가능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대규모 생산 시설에서 합성의약품, 항체의약품 등의 단일 품목 제조에 집중하던 사업 모델에서 벗어나 세포·유전자치료제, 펩타이드 같은 고객 맞춤형 서비스를 확대하면서다. 신약 개발기업 수요에 맞춰 생산만 전담하는 CDMO 역할이 커지면서 설계(팹리스)와 생산(파운드리)이 이원화된 반도체 산업 구조를 바이오산업이 따라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 론자, 후지 등 ‘모달리티 다양화’
일본 CDMO 기업 후지필름 바이오테크놀로지스의 라르스 페테르센 대표는 최근 한 유튜브 채널에 나와 “의약품 CDMO 기업이 바이오산업의 TSMC가 되는 것은 유망한 전략”이라며 “이런 분업을 통해 신약 개발 기업은 R&D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다”고 했다. 바이오의약품 시장이 항체 중심에서 펩타이드, 항체약물접합체(ADC) 등으로 다양해지는 것을 고려해 CDMO 기업도 생산할 수 있는 제품군(모달리티)을 다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CDMO 기업이 고객 맞춤형 소량 생산 서비스를 확대해야 한다는 취지다.
스위스 CDMO 론자는 지난달 ADC 생산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 2028년까지 공장 증설에 나선다고 밝혔다. 고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후지필름 바이오테크놀로지스도 내년부터 ADC 공장을 가동한다. 최근엔 암세포만 찾아가는 능력을 높인 펩타이드 선별 공정을 개발했다.
독일 코든파마도 최근 2027년까지 차세대 펩타이드 생산 시설을 짓기 위해 9억유로(약 1조5000억원)를 투자할 계획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지난 20일 2조7000억원을 들여 스위스 폴리펩타이드그룹 지분 100%를 인수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이런 ‘CDMO 모달리티 다양화’의 일환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 “반도체처럼 개발·생산 이원화”
바이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의약품 시장은 다품종 소량화하고 있다. 과거엔 하나의 블록버스터 신약으로 많은 환자를 치료했다. 하지만 이런 ‘초대형 블록버스터 신약 시대’는 점차 끝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정 유전자나 질환 등에만 듣는 세분화한 약이 개발되면서다. 비만치료제 소재로 잘 알려진 펩타이드도 희소 면역질환 치료제 등 다양한 소형 품목 신약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김승민 미래에셋증권 수석연구위원은 “비만치료제 수요 급증을 계기로 펩타이드 생산능력 확보가 CDMO 업계의 주요 전략으로 부상했고, 이런 흐름이 ADC 등 다른 모달리티로도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고 했다.
대형 블록버스터 신약 특허가 대거 만료되는 것도 CDMO 기업의 변화를 이끌었다. 한국바이오협회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2030년까지 특허가 끝나는 의약품은 200여개다. 이들의 연 매출은 290조~580조원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제약사(빅파마)는 블록버스터 특허 만료로 매출이 급감하는 ‘특허 절벽’을 피하기 위해 후속 제품 개발에 나서고 있다. 상당수는 차세대 모달리티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고객 수요에 맞춰야 하는 CDMO 산업도 이런 시장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정윤택 제약산업전략연구원장은 “신약을 개발해 빠르게 성장한 기업은 생산 능력, 규제 대응 능력 등을 내재화하기가 쉽지 않다”며 “이 영향으로 의약품 수탁생산(CMO)이 CDMO로 발전했고 앞으로 위탁연구개발생산(CRDMO)으로까지 나아갈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