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기 광풍으로 꼽히는 17세기 네덜란드 ‘튤립 파동’의 주인공은 꽃이 아니었다. 땅속에 묻힌 튤립 구근을 나중에 인도받는 권리를 적은 계약서가 거래의 실체였다. 미래의 기대를 현재의 수요로 끌어당긴 최초의 금융 버블 중 하나였다.
1990년대 말 닷컴 버블 때도 비슷한 그림이 반복됐다. 미국 통신장비업체 루슨트테크놀로지는 신생 통신회사에 거액을 대출해주고 장비를 파는 거래로 실적을 올렸다. 이른바 ‘벤더 파이낸싱’(판매자 금융)이다. 고객이 빌린 돈이 루슨트의 매출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지면서 고객이 줄줄이 파산하자 외상채권은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다. 1999년 말 84달러까지 치솟았던 루슨트 주가는 2002년 55센트로 폭락하며 동전주로 전락했다.
내 돈을 쥐여주고 물건을 팔아치우는 오래된 장사법이 AI 붐을 타고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번에는 ‘순환금융(circular financing)’으로 불린다. 구조는 훨씬 복잡하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엔비디아와 오픈AI의 거래가 단적인 예다. 엔비디아는 소프트뱅크가 짓는 데이터센터를 오픈AI가 임차하도록 최대 2500억달러까지 지급보증한다. 오픈AI는 그 신용으로 빌린 돈으로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산다. 소프트뱅크는 오픈AI의 투자자이면서 동시에 데이터센터 임대사업자다. 오라클이 오픈AI에 팔기로 한 컴퓨팅 파워 대금도 이 신용에 기대고 있다. 외신이 이 구조를 자신의 꼬리를 물고 도는 신화 속 뱀 ‘우로보로스’에 빗댄 이유다.
순환금융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 초기에는 모두의 매출과 기업가치를 키우는 혁신의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다. AI 생태계 안에서 돈이 잘 돌고 소비자에 대한 실질적인 매출 창출로 본격적인 기업 수익을 내면 순환금융은 아무 문제가 없다.
반면 AI 열풍이 식어 유의미한 매출을 내지 못하는 순간 고객사 지분가치 추락이라는 폭탄으로 돌변한다. 순환금융이 ‘혁신의 엔진’인지, ‘버블의 증폭기’인지 투자자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이제 결산의 시간이 머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