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대한 힘찬 갈망을 담은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갑자기 오페라 아리아가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앤디는 교도소로 들어온 위문품 중에서 낡은 LP 한 장을 찾아낸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방송실 문을 잠그고 LP를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그 순간 천상의 목소리처럼 우아한 노랫소리가 교도소 안에 울려 퍼진다. 동굴처럼 컴컴하던 교도소의 분위기는 삽시간에 반전된다. 음악 속에서 앤디의 동료 레드의 감동적인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난 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엇을 노래했는지 모른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고 싶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는 진실도 있다. 다만 그 노랫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파오기까지 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높고 먼 곳으로부터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우리가 갇힌 삭막한 새장의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에 쇼생크의 모두는 자유를 느꼈다."

[영화 '쇼생크 탈출' 중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가 울려 퍼지는 장면]

음악이 마치 마법처럼 주위의 공기와 색채를 바꾸는 그 순간, 교도소에 울려 퍼진 노래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중 백작부인과 수잔나의 2중창 ‘산들바람은 부드럽게’이다. 간혹 ‘편지 2중창’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바람둥이인 알마비바 백작은 하인 피가로의 연인인 하녀 수잔나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다. 수잔나는 백작부인과 공모해서 백작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녁에 정원 구석에서 몰래 만나자는 내용이다. 그때 백작부인이 수잔나로 변장하고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이중창은 백작부인이 편지의 내용을 한 구절씩 부르고 수잔나가 이 구절을 받아쓰며 내용을 따라 읽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나름 심각한 내용이지만 아리아는 가사처럼 산들바람보다 더 우아하고 가볍게 흘러간다. 오페라의 결말을 말하자면, 백작은 결국 피가로, 수잔나, 백작부인의 연합을 이기지 못한다. 백작은 백작부인에게 다시는 한눈팔지 않겠다고 싹싹 빌고 피가로와 수잔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행복한 신혼으로 첫발을 내디딘다.

우리에겐 오페라로 알려져 있지만 ‘피가로의 결혼’은 원래 연극 대본으로 먼저 쓰여졌다. 연극 대본을 쓴 보마르셰는 시계 제작 장인으로 일하다 희곡 작가가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피가로의 결혼’ 대본을 1765년에 완성했지만 루이 16세가 공연을 금지하는 바람에 초연은 1776년에야 파리에서 이루어졌다. 귀족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풍자한 데다가 하인, 하녀가 합심해 백작을 골탕 먹이는 장면이 사회 질서를 위협한다는 게 검열의 이유였다. 그런데 서른 살의 모차르트는 굳이 이 희곡을 로렌초 다 폰테에게 오페라 대본으로 고쳐 쓰게 했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1786년 빈에서 초연되었고 합스부르크 황실은 영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모차르트는 간절히 원했던 합스부르크 황실 궁정악장 자리를 결국 얻지 못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고 귀족의 위상이 공고했던 18세기 유럽에서 모차르트는 지나치게 진보적인 작곡가였다.

하인과 하녀가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게 ‘지나치게 진보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18세기 유럽의 가치관이었다. 그러나 시대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한번 생각해 보자. 하녀가 그림의 주인이 된 경우가 있을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그림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1632-1675)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다. 이른 아침, 여염집의 부엌에서 하녀가 가족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탁자에 올려진 호밀빵과 우유 단지를 보면 이 하녀는 호밀빵을 잘게 조각내고 그 위에 우유를 부어 일종의 우유푸딩을 만들고 있는 듯싶다. 흰 부엌의 벽에는 못 자국과 못을 박았다 뺀 자국들이 있고 왼편에는 젖빛 유리가 끼워진 작은 창이 나 있다. 바닥에는 세월의 흐름 속에 색이 바랜 걸레받이 타일과 발을 데우는 작은 난로가 있다. 하녀의 어깨와 굵은 팔뚝은 이 여성이 오랫동안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왔음을 보여준다.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우유를 따르는 하녀>, 45.5 x 41 c m, 1658-60년, 레이크스뮤지엄, 암스테르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우유를 따르는 하녀>, 45.5 x 41 c m, 1658-60년, 레이크스뮤지엄, 암스테르담
고요하고 치밀한 빛의 드라마

그림의 모든 요소는 지극히 평범하다. 집은 부잣집이 아니고 하녀로 일하는 처녀 역시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 처녀는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있어서 우리 눈에 얼굴이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런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우유를 따르는 하녀’에는 어떤 반짝거림이 있다. 모차르트의 선율이 쇼생크 교도소를 마법처럼 감싸 안았듯이, 페르메이르는 아침의 빛으로 작은 부엌을 감싼다. 왼편의 유리창은 반투명한 젖빛이다. 색유리를 통해 한 번 순화되어 들어온 아침 햇살은 부드럽게 공간을 채운다. 우리가 보기에 그림의 왼편, 하녀의 오른쪽 어깨와 두건은 눈 부신 빛 속에서 금방이라도 시야에서 사라질 듯 환하다. 특히 하녀의 이마가 희게 빛나는 이유는 그림의 창, 위에서 두 번째 창살 부분 유리가 깨져 조그만 구멍이 나 있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빛이 하녀의 이마에 그대로 가 닿고 있다.

‘우유를 따르는 하녀’는 가로 41센티미터, 세로 45.5센티미터에 불과한 작은 그림이다. 이 작은 그림, 보통 사람을 담은 그림이 왜 이렇게나 유명해진 것일까? 페르메이르는 이 작은 그림에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여러 장치들을 숨겨놓았다. 우리는 이 그림을 보면서 처녀를 살짝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화가가 그림의 시점을 처녀의 눈높이보다 밑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녀는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자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다. 그녀는 우유를 보느라 시선을 내리깔고 있고 두 손으로는 단지를 받쳐 들었다. 높은 보수를 받거나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일은 아니지만, 이 처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 그녀를 축복하듯 아침의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부엌을 감싸고 처녀의 이마를 어루만진다. ‘천국은 이처럼 근면한 자들의 것이다’라고 말하는 신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다.

그림 속 빛의 비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림의 뒤편, 흰 벽은 비어 있다. 17세기 중반, 여염집 부엌의 벽은 온갖 식재료와 먹거리가 주렁주렁 걸려서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르메이르는 굳이 하녀의 뒤편 벽을 희게 비어 있는 배경으로 처리했다. 이것 역시 화가의 치밀한 계산의 결과다. 우리가 볼 때 오른쪽, 그러니까 인물의 왼쪽 어깨와 팔, 엉덩이 부분은 그늘이 되어서 흰 벽에 선명한 윤곽선을 만들며 하녀의 모습을 우리 눈에 명확하게 각인시킨다. 그러고 보면 이 여성이 입은 옷의 색깔도 예사롭지만은 않다. 하녀는 노란 웃옷에 초록색 팔 토시를 끼고 붉은 치마 위에 푸른 앞치마를 둘렀다. 머리에는 흰 두건을 썼다. 하녀의 차림새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색깔의 옷들은 그녀를 우리 눈에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만든다. 특히 하녀의 머리 뒤쪽이 가장 밝다. 마치 성인의 머리 뒤에 보이는 후광처럼 말이다.

성인까지 연상한다는 건 지나친 억측 아닐까? 화가는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한다. 하녀가 두른 앞치마의 파란색은 17세기 당시 가장 귀한 안료였던 라피스 라줄리로 만든 파랑, ‘울트라마린’으로 칠해졌다. 라피스 라줄리는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에서만 났던 일종의 보석이었다. 이 보석을 갈아 가루로 만든 뒤, 잿물과 섞어 만들어낸 푸른색이 ‘바다를 건너온 색’이라는 의미의 ‘울트라마린’으로 불린 푸른색이다. 금보다 비쌀 정도로 귀했던 이 안료는 성모 마리아의 망토를 칠하는 데에 주로 사용되었다. 화가는 이 귀한 안료를 하녀의 앞치마에 아낌없이 칠했다.

페르메이르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는 알프스 이북의 유일한 공화국이었다. 무역으로 부유해진 이 작은 나라에는 귀족도 군주도 없었다. 부유한 시민 계급이 리드했던 17세기 네덜란드 사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신실함과 근면함이었다. 거의 400년 전에 그려진 이 그림은 우리에게 어떤 깨우침을 준다. 노동은 이처럼 고귀하며, 일하는 사람은 그 일의 종류나 나이, 외모와 상관없이 아름답다고 말이다.

서른 살에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한 천재 모차르트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네덜란드의 소도시 델프트에서 그림을 그리던 페르메이르는 네덜란드-프랑스 사이 전쟁이 터지며 경제적 상황이 악화되는 속에서 분투하다 마흔셋에 심장발작으로 급사했다. ‘피가로의 결혼’ 연극 대본을 쓴 보마르셰는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 바스티유 감옥 습격에 가담했다 투옥되었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우받는 공평한 세상을 마음 깊이 염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 나은 세계는 이들의 열망처럼 빨리 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림과 음악을 통해 예술가들은 말한다. 삶은 변함없이 아름답고 역사는 결국 발전하기 마련이라고.

전원경 예술 전문 작가•세종사이버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