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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발레리나의 역설…블랙 스완의 몸은 왜 조각나야 했는가
[arte] 이수정의 영화 속 악녀들
여성에게 강요되는 이중 구속을
영상 언어로 구현한 영화 <블랙 스완>
여성에게 강요되는 이중 구속을
영상 언어로 구현한 영화 <블랙 스완>
<블랙 스완>(2011)은 이 규율의 무게를 짊어진 니나(나탈리 포트만)의 이야기다. 타인의 시선에 갇힌 예술가의 각성을 그린 성장기이자 끝내 자기 통합에 실패한 예술가의 자멸 서사다. 깨달음엔 자기 파괴가 수반하고, 자기 파괴는 다시 예술로 이어진다. 이 순환의 고리 속에서 니나는 폭풍 속 깃털처럼 나부낀다. 예술과 예술가의 운명은 이처럼 같은 궤를 그리지 않는다. 예술이 성공하는 순간, 예술가는 또 다른 심연과 마주한다. 에너지의 근원인 동시에 발목을 잡는, 예술가의 마음속 암흑이라는 심연 말이다. 그리고 한 번의 비상 끝에 이 반흑반백(半黑半白)의 새는 뻘 같은 심연에 날개를 붙잡힌다.
자신의 춤이 완벽하기를 원한다고 니나가 말하자 발레단의 감독 토마스(뱅상 카셀)는 ‘완벽함은 통제가 아니야’라고 답한다. 그렇다. 통제란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을 끌어낼 수 없다. 예술을 완성하기 위한 과정에서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토마스는 언뜻 니나의 억압된 본성을 일깨워 그녀를 도약시키는 스승처럼 보인다. 그가 자극받는 여성상은 금기를 넘나드는, 도발적인 여성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에 맞춰 니나를 피그말리온으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토마스가 원하는 ‘위험한 여성상’ 역시 그의 뒤틀린 욕망이 투사된 허상에 불과하다. 감독과 단원의 관계에는 엄격한 위계가 있으며, 그가 원하는 여성의 자유분방함 역시 남성의 권위를 위협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만 허용된다.
니나의 삶은 거울로 둘러싸여 있다. 연습실과 분장실, 집 안 곳곳에 배치된 거울은 그녀를 끊임없이 복제하고 재생산한다. 거울이 끝없이 증식시킨 니나의 상은, 제도로서의 예술이 규범화한 여성성을 그녀 안에 욱여넣는 폭력을 상징한다. 발레는 오랫동안 인내와 고통을 통해 제련된 우아함을 드러내는 예술로 소비되어 오지 않았나. 깨진 유리의 날카로운 파편 속에서, 거울에 비친 상(想)에서 어느 순간 오딘이 그녀를 응시한다. 거울은 이상화된 예술가의 상과 실재하는 자신 사이에서 일어나는 니나의 파열을 생생하게 비춘다.
전통적으로 발레리나의 신체는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조각나고 훼손되었다. <블랙 스완>에서 니나의 몸은 통증과 변형이 일어나는 장소다. 손톱이 찢어지고, 살갗이 갈라지고, 다리가 휘는 환각은 발레리나의 몸이 ‘아름다움’이라는 신화 뒤에서 어떻게 규정되고, 동시에 어떤 고통에 시달리는지를 보여준다. 수전 보르도가 말했듯 “여성의 몸은 규율된 담론의 산물”이다. 통제되고 억압된 신체에서 드러나는 마조히즘적 쾌락을 보여주기에 니나만큼 적합한 인물은 없다. 주체성과 욕망이 결여되었으며 순진하고 연약하다.
그녀 안에서 싸우는 오데트와 오딘은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 통합이 아닌 자기 파괴만이 유일한 해답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불길한 예감은 무대 위에서 현실이 된다. 핸드헬드 카메라는 니나의 시선을 집요하게 추적하며 그녀가 바라보는 세계를 관객의 눈에 이식한다. 흔들리는 프레임 속에서 우리는 니나의 불안을 직접 체험한다. 그녀의 시선을 강제로 공유하게 함으로써 영화는 관객을 니나가 갇힌 심리적 감옥 안으로 끌어들인다.
니나의 대역 릴리(밀라 쿠니스)는 니나의 그림자다. 진지함과 성실성은 니나에 비해 부족하지만 춤추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길 줄 안다. 술과 남자, 약물을 거리낌 없이 즐기는 자유분방함 또한 니나가 가지지 못한 태도다. 릴리와의 유쾌한 밤을 보낸 뒤 니나는 릴리와 동침하는 환상에 빠진다. 절정의 순간, 그녀는 자신을 애무하는 릴리의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본다. 그 순간 니나는 타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욕망을 발견한다.
다시 오데트로 돌아온 니나는 복부에 난 상흔을 발견한다. 무대 위 매트리스로 추락하며 그녀는 말한다. "나는 완벽했어(I was perfect)." 과거형에 주목하라. 완벽함은 현재에 존재할 수 없다. 완벽함은 완결을 통해서만 달성되며 완결은 곧 죽음을 뜻한다. 죽기 전 단 한 번 노래한다는 백조처럼 니나는 종국을 맞이한다. 타인의 욕망을 대리 실현하던 여성 예술가가 자기 욕망을 맞닥뜨리는 과정은 이토록 비극적이다. 이는 예술의 완성인가, 예술가의 실패인가.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다만 니나의 얼굴에 번지는 황홀한 미소를 비출 뿐이다.
뤼스 이리가레는 여성이 '타자의 타자'로서만 존재해 왔다고 말했다. 남성의 욕망을 반영하는 거울, 남성 주체가 자신을 확인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성. 니나의 비극은 바로 이 구조 안에서 자기 욕망을 발견하려 애썼다는 데 있다. 그녀는 토마스의 그것도, 어머니의 그것도 아닌 자신의 욕망을 찾았지만, 그 욕망의 표출마저 오딘이라는 또 다른 타자의 형상을 빌려야만 했다. 예술이 구현하는 여성성의 미학 뒤에는 이처럼 철저한 통제와 폭력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성 예술가들은 때로 그 규율을 따르고 때로 단호히 반기를 들며 예술의 의미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려 애쓴다.
여성의 문법으로 다시 태어난 미학은 여성 예술가의 신체에 관해 어떤 윤리적 잣대를 마련할까. 한 예술가의 완벽한 비상과 추락을 목격한 우리에게 영화는 강수진의 뒤틀린 발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묻는다. 예술은, 과연 이만한 희생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가. 여성 예술가들은 계속 뒤틀린 신체와 통증, 때로는 죽음의 위협마저 감수하며 서서히 그들의 언어를 다시 써 내려갈 것이다. 그때까지 무대 위 백조들은 우아하게 날갯짓하고, 수면 아래 물갈퀴는 여전히 물살을 박차고 있을 것이다.
이수정 문화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