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숲에서 찾은, 홀로 선 건축

여행작가 김동완 선생이 조선시대의 누정(樓亭, 누각과 정자)에 관해 엮은 책 『홀로 선 자들의 역사』를 최근에 읽었습니다. 이 책을 찾아 헤맨 지는 4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서평을 읽은 직후 자주 방문했던 남산도서관에서 책을 찾았는데, 아마도 어느 시점에 누군가 실수로 엉뚱한 위치에 꽂아 두었기 때문인지 끝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꼭 도서관에서 읽고 싶었던 책이었으니 차마 구입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올해 봄에 새로 이사한 동네에서 우연히 이 책과 마주하게 됐습니다. 원래는 서가에서 다른 책을 찾기 위해 둘러보는 중이었는데 운명처럼 <홀로 선 자들의 역사>와 만났습니다. 마치 한적한 숲과 계곡을 누비다가 누각이나 정자를 만난 것처럼 ‘책과 사유의 숲’에서 홀로 선 그 책을 만난 것이죠. 이 책에는 안동 만휴정과 고산정, 담양 면앙정을 비롯해 조선시대의 학자와 문인들이 거닐었던 누정이 등장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위대한 인물들이 관직을 떠나 은둔하거나 유배 중에 머물렀던 곳도 많습니다. 몇 년 만에 이 책을 발견했을 때, 마치 속세로부터 먼 곳으로 꼭꼭 숨어들어 홀로 선 인물을 찾은 것처럼 반가웠습니다.
안동의 만휴정 / 사진. © 김현호
안동의 만휴정 / 사진. © 김현호
절경 속 정자와 누각은 외세로부터의 침략과 자연재해 속에서도 그 모습을 굳건히 유지해온 경우가 많은데, 아마도 쉽게 닿을 수 없는 자연 속에 건축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속세의 발길이 닿기 힘들수록 보전 가능성은 오히려 높아질 터이니, 누정의 운명이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누정이 선 장소는 유배지와 궤가 같을지도 모릅니다. 강진 해남 남해 흑산 제주 등 여전히 기막힌 자연을 품은 장소는 아득한 먼 옛날에는 유배지로 알려진 ‘세상의 끝’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한편으론 세상으로부터 격리되고 추방의 상징이었던 그 장소들이 이제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으니 참으로 흥미롭기도 합니다. 고독한 장소에 의연하게 솟은 담양 소쇄원, 강진 백운동원림의 누정, 다산초당을 연이어 방문했을 때 ‘한번쯤 홀로 서는 경험도 소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진 만덕산의 다산초당 / 사진. © 김현호
강진 만덕산의 다산초당 / 사진. © 김현호
홀로 서서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

홀로 선 건축은 외로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의연하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은데, 누각과 정자가 딱 그러합니다. 물론 홀로 설 수 있는 것은 건축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가끔 도시를 조금 벗어나 옛 필지를 그대로 간직한 마을을 만나게 되는데요. 마을의 입구에는 소원을 빌고 그늘이 되어주는 당산나무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보호수’라는 이름으로 수백 년에서 수천년씩 마을을 지켜낸 당산나무 말입니다. 그늘이 넓어 평상을 놓기도 하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니 당산나무는 우리식 아고라(Agora, 고대 그리스 폴리스에서 시민들이 토론을 펼쳤던 장소)였던 셈이죠. 지방자치단체의 담당 공무원들이 수목을 특별히 아끼고 가꾼다는 의미에서 ‘보호수’라고 이름 지었으나,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마을을 지켜왔으니 누가 누굴 보호했는지는 한번 따져 볼 일입니다.
250년 이상 마을을 지켜온 서어나무와 느티나무 / 사진. © 김현호
250년 이상 마을을 지켜온 서어나무와 느티나무 / 사진. © 김현호
『홀로 선 자들의 역사』에도 이 당산나무에 관한 이야기가 참 세심하게 담겼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예로부터 당산나무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뜻을 모으는 공론의 장이었는데, 그런 까닭에 모든 길이 통하고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심지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자(亭子)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왜란 때마다 의병을 불러 모으기도 해서 ‘의병나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홀로 선 당산나무가 사람만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당산나무는 그 종류가 무엇이었건 수십여마리의 새를 품습니다. ‘만약 이 자리에 당산나무가 없었다면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걱정하게 될 정도입니다. 새들은 당산나무의 품종을 가리지도 않는 듯 보입니다. 느티나무, 회화나무, 벚나무뿐만 아니라 이팝나무와 상수리나무도 당산나무의 역할을 할 때가 많기 때문이죠. 한번은 여행 중 원래의 목적지 대신 우연히 마주친 이팝나무 아래 그늘서 오랫동안 새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벚꽃이 진 것을 아쉬워하던 아내가 아이들에게 흐드러지게 핀 이팝나무, 그것도 수령이 아주 오래된 나무를 보여주겠다며 찾아낸 것이었습니다. 이팝나무를 즐기고, 해 질 녘 도착한 마을 어귀에도 새들을 품은 당산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우뚝 서 있었습니다. 새처럼 당산나무가 좋아 꽤 오랫동안 주위를 빙 둘러 자전거를 타거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걸었습니다.
600년 동안 마을을 지켜낸 이팝나무 / 사진. © 김현호
600년 동안 마을을 지켜낸 이팝나무 / 사진. © 김현호
사카모토 류이치와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독

사카모토 류이치의 ‘고독(Solitude)’은 비참하거나 쓰라린 대신 단단하고 비장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이 음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모음집인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작품을 영화화한 <토니 타키타니(2004)>의 주제곡으로 삽입됐었는데요. 고독함·상실·기억과 추모에 관해 사유하게 되는 영화 <토니 타키타니>의 주인공 토니 타키타니는 사무치는 고독을 온몸으로 견뎌내는 인물입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었고, 공연을 다니느라 밖으로 떠도는 아버지로 인해 평생을 홀로 서 왔기 때문이죠. 언제나 혼자일 것 같았던 토니 타키타니는 생업에 집중하던 어느 날 우연히 ‘머나먼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친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옷을 입은(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을 그대로 인용)’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운명처럼 만난 아내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끊임없이 옷을 구매하는 인물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인물에 대해 ‘매혹당한 듯한 눈빛으로 닥치는 대로 마구 옷을 사들’이거나 ‘옷을 전부 입어보려면 족히 2년 가까이나 걸린다는 계산’이 나올 정도로 옷 사기에 중독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중반에 이르러 옷 사기를 조금 줄여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토니 타키타니의 제안에 가장 최근에 산 옷을 환불받으러 외출한 아내가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아내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방을 한가득 채운, 마치 아내가 투영된 것 같은 옷을 보며 대신 입어 줄 사람을 찾아 나섰던 토니 타키타니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다시 ‘홀로 선’ 존재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선 토니 타키타니를 응원하듯 사카모토 류이치의 ‘고독(Solitude)’이 또다시 흐르게 되죠. 이때의 토니 타키타니는 당산나무나 누각처럼 의연한 모습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 - 고독(Solitude)]


당산나무와 정자, 토니 타키타니의 고독

언젠가 강릉시 교동에 위치한 강릉시립미술관에 들러 마이클 케나의 사진전 <망대: 고요의 풍경>을 감상한 적이 있습니다. 작가가 수십여년에 걸쳐 한국의 양양 속초 고성 강릉 등 해안가와 비무장지대에 홀로 선 망대(望臺)를 촬영한 작품인데, 그 흑백의 장면들이 처연하기는커녕 수묵화처럼 깊고 늠름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 더 이상 당산나무나 정성 들여 올린 누정이 없지만, 망대처럼 홀로 선 존재가 있구나’ 하고 말이죠. 자세히 보면 우리 곁에는 여전히 홀로 선 것이 많습니다. 토니 타키타니처럼 슬퍼할 겨를도 없이 홀로 서야 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죠. 근사한 정자와 누각, 오랜 시간을 공들여 키워내는 당산나무까지는 아니더라도 새로운 계절에는 마음속에 소박한 망대를 하나 세워두는 것은 어떨까요? 상상만으로도 참 든든해지는 저녁입니다.

김현호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