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 희부연 의식 속에서 떠올리는 간밤의 꿈, 때로는 분명히 떠오른다. 어떤 꿈들은 낯선 곳에 갔다가 길을 잃는 것 같은 내용으로 반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다시 생각나지 않는 꿈, 약간의 실마리만을 남겨뒀다가 이내 그마저 증발해 버리는, 영영 놓치고 마는 꿈이 더 많다.
그런데도 꿈속에서 느꼈던 감정만은 선명하게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어떤 때는 진한 상실감, 서운함이 길게 남는다. 다시 만나고자 했으나 만나지 못한 것, 기대했으나 다시 보지 못한 것. 그 대상은 사람이었을까, 아름다운 광경이었을까, 다른 어떤 소망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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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 년 전 이 땅의 재주 있는 여성이었던 황진이는 지난밤에 꾼 꿈을 이렇게 노래했다.
서로 그리워하고 만나는 것은 오직 꿈에 기댈 뿐인데 내가 임을 찾아갔을 때 임은 나를 찾아가고 없네. 바라건대, 아득한 다른 밤의 꿈에서는 같은 때 떠나 길 위에서 만나기를.
일제강점기 문인 김억(김안서)은 이 한시를 이렇게 옮겼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같이 떠나 도중에서 만나를 지고’
작곡가 김성태가 1950년 곡을 붙인 가곡 ‘꿈’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내게는 이 시를 떠올리게 하는 다른 음악 작품이 있다. 에드워드 엘가가 무명 시절 작곡한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이다. 꿈에서 만나고자 했지만 만나지 못한 그리운 대상. 사랑과 서운함이 엇갈리는 그 서글픔, 나아가 다음번 꿈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는 마음이 상상으로 느껴진다.
[에드워드 엘가 ‘현을 위한 세레나데’ 2악장]
꿈에서 만났던 아름다운 대상을 다시 만나고자 하는 갈망은 여러 나라를 걸쳐 공통된 듯하다. 유명한 각국의 노래들 역시 그렇다. 포레의 가곡 ‘꿈을 꾼 뒤에(Après un rêve)’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시는 프랑스 국민음악협회의 초대 회장을 지낸 로맹 뷔신이 썼다.
당신의 모습에 매혹된 잠 속에서 행복을 꿈꾸었네, 열렬한 환영(幻影)을 당신의 눈은 부드러웠고, 목소리는 맑게 울려 퍼졌네 당신은 새벽에 빛나는 하늘처럼 빛났네 나를 부르기에 나 대지를 떠나 함께 빛을 향해 날아갔네 하늘은 우리에게 구름을 열어주고, 알지 못하던 광채, 신성한 빛을 보았네 아! 꿈에서 깨어난 슬픈 현실이여 밤이여, 그 달콤한 환영을 돌려다오, 돌아오라, 돌아오라 빛나는 밤, 돌아오라 오 신비로운 밤이여!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 영국 빅토리아 여왕 가족의 음악 교사가 된 작곡가 토스티도 가곡 ‘꿈(Sogno)’에서 덧없이 스러진 꿈을 노래한다. 이 노래가 간구하는 대상은 성스러운 대상인 동시에 욕망의 대상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 모순이 주는 고통이 화자(話者)의 꿈을 깨게 했을 것이다.
당신이 무릎을 꿇고 있는 꿈을 꾸었소 주님께 기도하는 성자처럼 당신은 내 눈을 들여다보았소 당신의 시선은 사랑으로 빛났죠
당신은 말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콤하게 자비를 구했소 약속이 될 단 한 번의 시선을 당신은 간청하며 내 발 앞에 엎드렸죠
나는 침묵했고, 강한 영혼으로 유혹하는 욕망과 싸웠소 나는 순교와 죽음을 겪은 끝에 자신을 이기고 ‘안돼요’라고 말했죠
하지만 당신의 입술이 내 얼굴을 스쳤소 그러자 내 마음의 힘은 나를 배반했소 나는 눈을 감고 당신에게 팔을 뻗었죠 하지만, 꿈이었고… 아름다운 꿈은 사라졌소
슈베르트가 동시대 시인 마테우스 폰 콜린의 시에 곡을 붙인 ‘밤과 꿈(Nacht und Träume)’에서는 밤 자체가 거룩한 존재가 된다. 욕망과 싸울 필요가 없다.
거룩한 밤이여, 그대 내려와 드리우니 꿈들 또한 내려온다. 그대의 달빛이 공간을 가로지르듯 사람들의 고요한 가슴을 가로질러, 사람들은 기쁨으로 엿들으며 날이 밝으면 외친다. 돌아오라, 거룩한 밤이여! 사랑스러운 꿈들이여, 다시 돌아오라!
꿈에서 깬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일까? 사소하고 범속하며 잔인한 현실일 뿐일까? 꿈 뒤에 우리에게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세계, 우리가 실제 경험한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실제론 꿈에 불과하지 않을까? 감성과 마성(魔性) 사이를 오갔던 미국 문인 에드거 앨런 포는 시 ‘꿈속의 꿈(A Dream within a Dream)’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파도에 시달리는 해안의 굉음 속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내 손안에 쥐고 있습니다. 금빛 모래알들—얼마나 적은지! 그런데도 어떻게 그것들이 내 손가락 사이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지, 내가 울고 있는 동안—내가 울고 있는 동안! 오 신이여! 내가 더 꽉 움켜쥐고 그것들을 잡을 수는 없습니까? 오 신이여! 무자비한 파도로부터 내가 단 하나라도 구할 수는 없습니까? 우리가 보거나 존재하는 모든 것이 꿈속의 꿈일 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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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작품 속의 가장 잔인한 꿈을 들자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일 것이다. 주인공은 다가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해 아편을 삼키고, 꿈속에서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살해한 뒤 단두대에서 목이 ‘뎅겅’ 잘린다. 죽은 뒤의 환영에서는 그 여인이 마녀의 밤잔치에서 난잡한 행위에 동참하는 것을 목도한다.
이 끔찍한 교향곡의 후예를 나는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에서 찾는다. 사랑하는 여인이나 약물과 관련된 표제는 없다. 그러나 이 곡에는 꿈과 같은 환상 속에서 주인공 또는 영웅이 겪는 온갖 투쟁과 좌초, 경악이 있다. 서정적인 듯싶은 느린 악장에조차 뒷머리를 후려치는 경악이 숨어있다.
마지막 4악장의 시작은, 이 낭만주의 시대의 작곡가가 ‘꿈의 해석’을 쓴 프로이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그에게서 상담까지 받은 주인공임을 떠올리게 한다. 말러에게 “내게 이 교향곡은 ‘꿈 교향곡’입니다”라고 한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구스타프 말러 교향곡 6번 4악장]
이 모든 것이 꿈속의 꿈일지라도, 단두대가 떨어지고 육중한 해머의 타격이 펼쳐지는 세계에서 깨고 싶지는 않다. 안온하고 포근한 십일월의 침실, 나를 깨운 것은 ‘꿈을 꾼 뒤에’의 작곡가 포레가 쓴 레퀴엠(장송미사곡) 중 ‘신의 어린 양(Agnus dei)’이다.
이 악장은 평화로운 전주로 시작해 이 전주와 동일하지만 한 음 반 더 낮게 잔잔히 깔리는 후주(postlude)로 끝난다. 전주와 후주 사이에 펼쳐지는 것은 밤마다 우리의 영혼에 침입하는 두려움의 세계다. 그 두려움과 싸운 끝에 찾은 평화이기에 더욱 달콤하고 신비롭다.
[가브리엘 포레 ‘레퀴엠’ 중 ‘신의 어린 양’ 후주]
그런데, 꿈을 깨는 나를 못내 아쉽게, 서운하게 만든 그것은 결국 무엇이었던가? 오늘 밤에 다시 만나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