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은 공연장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시간을 석 달 전으로 잠깐 돌려본다. 뚜벅이가 아끼는 또 하나의 작은 공연장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열린 더하우스콘서트 줄라이 페스티벌 현장이다. 렉처 콘서트가 열린 7월 7일, 올해 줄라이 페스티벌의 주제였던 스트라빈스키와 20세기 러시아 작곡가들에 대한 강의와 연주가 있던 날이었다.

렉처 콘서트로 만나는 작곡가들의 이야기와 음악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열린 와인파티에서는 강의를 진행한 임수연 피아니스트를 만나 ‘정말 재미있고 유익했다’고 인사를 건네고 가볍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현대음악에 관심 있으면 일신홀에서 열리는 프리즘콘서트 시리즈를 보러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임수연 피아니스트는 일신문화재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분이었고, 현대음악이라면 항상 벽이 느껴지지만 그래서 늘 궁금하기도 한 나는 그 말에 솔깃해 다가오는 공연을 체크해두었다가 9월의 마지막 금요일, 프리즘콘서트를 보러 ‘일신홀’을 찾게 된 것이다.
[좌] 일산홀 로비  [우] 로비에서 관람객이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 사진. © 권혜린
[좌] 일산홀 로비 [우] 로비에서 관람객이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 사진. © 권혜린
저녁 무렵의 한남대로. 격자무늬의 핫핑크색 조명이 켜진 유리 건물 ‘일신빌딩’이 눈에 띈다. 로비에 들어서면 높은 천장에 유리 계단이 시원하게 뻗어있고 곳곳에 전시된 다양한 미술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음악을 들으러 왔는데 갤러리에 온 기분이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국내외 거장들의 작품 50여 점이 전시돼 있어 한번쯤 여유 있게 들러 천천히 감상해보고 싶어진다.
일신홀 외관 / 사진출처. 일신홀 페이스북
일신홀 외관 / 사진출처. 일신홀 페이스북
로비 한쪽, 게오르그 바젤리츠와 이불 작가의 작품 아래 일신홀 티켓 부스가 있으니 예약을 확인하며 작품을 보는 것도 놓치지 말자.

189석 규모의 일신홀은 층고가 높아서 공간이 넓어 보이고 무척 시원한 느낌을 준다. 내부는 나무로 마감해 음향이 좋고 무엇보다 객석 하나의 공간이 여느 홀보다 넓어서 비행기에 비유하자면 비즈니스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편하다.
공연 전 렉처, 일신문화재단 예술감독 임수연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공연 전 렉처, 일신문화재단 예술감독 임수연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내가 찾은 이날 공연은 <2025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 - 루치아노 베리오(Luciano Berio) 탄생 100주년 ‘세쿠엔차(Sequenza) 전곡 연주’의 첫 번째 시간으로, 독주 악기를 위해 베리오가 쓴 14곡의 세쿠엔차 가운데 플루트와 하프, 여성의 목소리, 피아노와 트롬본, 비올라까지 총 6곡이 무대에 올랐다. 연주에 앞서서는 임수연 예술감독의 강의가 진행돼 작곡가의 의도나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9월 26일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좌] 플루트 윤서영 [우] 하프 이우진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9월 26일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좌] 플루트 윤서영 [우] 하프 이우진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9월 26일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좌] 소프라노 알레시아 현경 박 [우] 피아노 지유경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9월 26일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좌] 소프라노 알레시아 현경 박 [우] 피아노 지유경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9월 26일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좌] 트롬본 김성수 [우] 비올라 라세원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9월 26일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좌] 트롬본 김성수 [우] 비올라 라세원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다양한 실험적 기법을 연구했던 이탈리아 작곡가 베리오의 작품은 나에겐 아주 낯설었지만 한 순간도 눈과 귀를 뗄 수 없을 만큼 재미있고 신선했다. 악기의 한계를 넘어서는 듯한 소리를 내고 익숙하지 않은 주법으로 연주하는 연주자의 모습은 단순히 음악이 아닌 한 편의 모노드라마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리오는 각 세쿠엔차를 가리켜 ‘호기심 많고 새로운 경험을 갈망하는 두 사람, 즉 한 명의 비르투오소와 한 명의 작곡가가 만나는 인간적인 만남이다’라고 했다는데, 그 만남 덕분에 나처럼 호기심 많은 관객도 새로운 음악적 경험이 주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일신홀에서 공연을 본 적이 있지만 기획 공연인 프리즘콘서트를 보고 나니 이곳이 더욱 궁금해졌다. 2017년부터 매달 꾸준히 현대음악 공연을 올리고, 내로라하는 국내외 연주자들이 연주를 하는 곳. 심지어 티켓은 무료이고 선착순 예약이 오픈하면 금세 마감이 되는 곳. 궁금증을 풀기 위해 ‘작은 공연장’의 인연을 무기(?) 삼아 임수연 예술감독에게 인터뷰를 요청했고 감사하게도 친절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임수연 예술감독
임수연 예술감독

▶ 일신홀은 어떤 공간인지 소개해주신다면요?

“일신홀은 2009년에 문을 연 클래식 전문 공연장이에요. 일신방직 김영호 회장님의 철학이 담긴 공간입니다. 문화예술에 정말 조예가 깊은 분이고 오랫동안 문화예술계 후원을 해오고 계시는데 보다시피 건물 로비에 미술작품이 많거든요. 그래서 미술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그런 종합 예술적인 공간을 만들고 싶으셨다고 해요. 지금은 대관도 하지만 애초에 대관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규모가 작게 만들어진 것이고요. 작은 규모지만 음향이나 시설 모두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미술 작품이 있는 로비, 로비에는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줄을 서있다.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미술 작품이 있는 로비, 로비에는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 줄을 서있다.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 저는 예전에 일신홀에서 유료 공연을 본 적이 있는데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는 무료로 열리는 기획 공연이더라고요. 어떤 차이가 있나요?

“일신방직에 속한 일신홀은 대관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유료 공연도 열립니다. 제가 예술감독으로 있는 일신문화재단은 공익재단인데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곳이기 때문에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와 같은 기획 공연을 열고 무료로 운영하면서 시민들에게 문화예술 향유의 기회를 제공하는 거죠. 이 공연에 참여하는 연주자들도 그 취지에 공감하고 있고요.”

▶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가 2017년부터 시작됐다고 들었어요. 현대음악을 다루는 흔치 않은 기획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탄생한 건가요?

“제가 기획을 했고 2017년 9월에 첫 공연이 열렸어요. 저도 연주자이지만 한국 클래식 음악계도 좀 더 다양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현대음악이 접근성이 좋은 장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이 음악의 가치를 발견하고 이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예술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잖아요. 당대의 음악을 소개하고 공유함으로써 음악계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김영호 회장님의 철학 중 하나가 ‘동시대 예술가를 후원한다’는 거예요. 일신빌딩 로비에 전시된 미술작품도 모두 현대 작가들의 작품이죠. 그런 뜻과도 잘 맞아서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운영하며 현대음악을 선보이고 있어요.”
일신홀 로비, 백남준의 선덕여왕 작품이 있다. / 사진. © 권혜린
일신홀 로비, 백남준의 선덕여왕 작품이 있다. / 사진. © 권혜린
▶ 현대음악에 대한 예술감독님의 남다른 애정과 사명감이 느껴지네요.^^

“저는 ‘좋은 현대음악’을 좋아합니다. 관객은 물론 연주자에게도 현대음악에 대한 경험은 많이 부족해요. 동시대 작품이기 때문에 경험과 평가의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죠. 좋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섞여 있기 쉬워요. 그래서 저는 현대음악을 ‘잘 선별해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옥석을 가리기 위한 기회가 바로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신홀은 대관 공연도 특정 프로그램을 제외하고는 현대 작품을 5분 이상 포함하도록 하고 있어요. 음악을 감상하는 여정에 여러 길이 있겠지만, ‘일신홀’에는 낯설고 구불구불해도 좀 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길이 있으니 많이 이용해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웃음)”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객석 관객들의 모습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베리오 세쿠엔차 시리즈 공연, 객석 관객들의 모습 / 사진. 김보연 Bo Yeon Kim
‘일신 프리즘콘서트 시리즈’는 내년 하반기 100회를 맞는다고 한다. 또 2026년, 헝가리의 음악가 죄르지 쿠르탁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획 공연도 있을 예정이라고 하니 기대해 봐도 좋겠다.

마지막으로 ‘일신홀이 어떤 공간으로 남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임수연 예술감독은 ‘영원히 세련된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문화예술을 사랑한 기업가의 철학이 담긴 누구에게나 열린 작고 아름다운 홀, 다양한 음악적 경험을 선사하고자 하는 기획자와 연주자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즐기는 관객들이 어우러진 이곳은 지금도 충분히 세련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음악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 이 작고 세련된 홀에서 낯설지만 새로운 길을 한번쯤 걸어보는 건 어떨까?

권혜린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