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증권사 이어 수출기업까지 전방위 압박…환율은 요지부동

정부 "기업 환전정보 내라"…수출·금융사 점검

올해 수출 대금 절반만 환전
기업 "달러 더 오른다" 기대 영향
정부, 내역 점검해 '적극 환전' 유도
한은-국민연금 통화스와프 연장

구조적 원인은 해결 안하고…
"경제 펀더멘털 회복이 먼저인데
서학개미·기업 탓만"…시장 냉랭
1일 서울 명동의 환전소에서 외국인이 환전하고 있다. 이날 서울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보다 70전 내린 1469원90전에 주간거래를 마쳤다. / 사진=이솔 기자
도이체방크는 최근 고객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코로나19 발생 이전까지만 해도 해외에서 벌어들인 외화의 90%를 원화로 환전하던 한국 기업들이 올 들어 절반 정도만 환전하고, 나머지는 해외에 보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기업들의 연간 외화 수입 360억~600억달러 가운데 150억~240억달러가 미환전 상태로 해외에 머무르면서 고환율의 요인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 관계자는 “최근 통계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의 절반도 환전하지 않는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환율 오를 것’ 기대심리 끊는다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 등 관계기관이 1일 합동으로 발표한 외환시장 안정 대책은 환율이 추가로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심리를 차단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환율이 오를 것이란 기대 때문에 기관투자가와 개인이 해외 자산 비중을 확대하고, 기업은 달러 환전을 미뤄 ‘기대 심리 주도형 환율 상승’이 이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한국은행이 이날 발표한 ‘3분기 중 주요 기관투자가의 외화증권 투자 동향’에서도 이 같은 흐름이 확인됐다. 환율이 큰 폭으로 오른 시기에 국내 기관투자가들의 3분기 해외 증권 투자 잔액은 4902억달러로 지난 2분기보다 247억달러 증가했다. 지난달 27일 기준 5대 시중은행의 기업 달러 예금 잔액은 537억달러로 10월 말보다 21% 급증했다.

정부는 이에 달러 수요를 부추기는 3대 주체로 지목된 국민연금과 서학개미, 수출 기업에 대한 대책을 내놨다.

먼저 주요 수출 기업의 외환 보유 및 환전 현황을 직접 받아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한국은행의 전산망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보유 상황을 확인했지만, 앞으로는 정부가 직접 수출 기업들로부터 외환 관련 자료를 제출받아 적극적인 환전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외국환거래법 20조는 기재부 장관이 외환시장 안정 등 필요에 따라 외환 거래 기업의 자료를 보고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의 정책 대출과 보증 등에 환전 실적을 연계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펀드를 집행할 때 환전에 적극적인 기업을 우대하는 방안 등이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감독원은 이달부터 다음달까지 증권사 등의 해외투자자 보호 실태를 점검한다. 서학개미의 해외투자를 직접 제한하기보다 과도한 투자를 부추기는 증권사의 마케팅 활동을 억제하겠다는 방침이다. 서학개미의 10월 해외 주식 순매수액은 68억달러로 무역흑자(60억달러)보다 많았다.

올해 말 종료되는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의 통화 스와프 계약(연간 650억달러 규모)도 연장한다. 국민연금이 외환시장에서 직접 달러를 사는 대신 한은의 외환보유액을 빌려서 투자하면 환율에 미치는 영향을 줄일 수 있다.

◇“구조적 원인 해소책 안 보여”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달러 수요를 부추기는 수급 주체를 압박하는 내용만 있을 뿐 한·미 간 금리 차, 팽창한 통화량, 국내 기업 경쟁력 약화 등 환율 상승의 구조적 원인을 해소할 방안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에서다.

한 시중은행 외환 딜러는 “달러를 갖고만 있어도 10% 이상 수익을 낸 경험을 한 투자자들이 원화 자산으로 돌아올 이유가 없다”며 “올해 초 미국 기술주가 급락했을 때 환율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것처럼 미국 증시가 폭락하지 않는 한 해외 투자는 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시장의 반응은 환율에도 반영됐다. 이날 아침 발표 직후 1465원대까지 떨어진 원·달러 환율은 다시 상승해 1469원90전으로 주간거래(오후 3시30분 기준)를 마쳤다. 지난달 26일 구윤철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기재부, 한은, 보건복지부, 국민연금 등 4자 협의체의 논의 개시를 발표했을 때도 환율은 1457원까지 하락했다가 간담회 직후 다시 올라 1465원60전에 마감했다.

이광식/정영효/남정민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