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中·日, AI지원 경쟁하는데…주병기 "기업, 금산분리 규제탓만"
입력
수정
지면A3
"금산분리 완화는 최후의 수단"
자금 조달 '속도전'서 밀린다
주병기 공정거래위원장의 지난 21일 주요 발언은 현재 정부 내에서 논의 중인 금산분리 규제 완화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공식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주 위원장은 이날 금산분리 규제 완화에 대해 “수십 년 된 규제를 몇 개 회사의 민원 때문에 바꿀 수 없다”고 강조했다. 또 투자를 위해 규제 완화를 요구한 기업을 향해선 “규제 탓만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직격했다.
이런 발언을 전해 들은 경제계는 “국가 주도로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 경쟁을 벌이는 인공지능(AI)과 반도체산업의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해당 기업들은 “기업 특혜가 아니라 국익 차원에서 규제 완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규제로 가로막힌 첨단산업 투자
경제계가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주 위원장 발언은 대기업들이 과거처럼 문어발식으로 확장하고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다. 주 위원장은 국내 기업을 향해 “선단경영을 하면서 수많은 부실 기업을 거느리고, 그중 잘나가는 기업의 생산성을 저해한다”고 비판했다. 또 “기업들은 본업에 충실해야 한다”며 “기업들이 투자회사를 설립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처럼 여기저기 투자를 확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경고했다. 이런 현실 인식에서 산업과 금융을 분리하는 현행 금산분리 규제는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런 인식이 최근 산업계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입을 모았다.◇ 한국에선 기업·금융사 공동 투자 규제
한국에서 이런 투자는 공정거래법상 지주회사 규제와 은행법, 자본시장법상 금산분리 규제 등으로 사실상 금지돼 있다. 대기업에서 일반화된 지주회사는 펀드를 자회사로 거느릴 수 없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VC)을 소유할 수 있지만 지분을 100% 보유해야 한다. 차입 규모는 자본총액의 200%로 제한된다.해외에서 기업과 금융회사의 공동 투자는 점점 일반화되고 있다. 세계 1위 소셜미디어그룹인 메타는 지난달 사모펀드 블루아울캐피털과 데이터센터 개발을 위해 270억달러(약 38조원) 규모로 합작투자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 정부에서 직접 자금 지원을 받는 인텔도 아폴로자산운용으로부터 약 16조원을 투자받아 파운드리공장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이런 추세를 반영해 국내에서도 일반지주회사가 투자전문회사(GP)를 소유할 수 있도록 금산분리 규제를 완화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금융회사도 첨단산업에 더욱 쉽게 자금을 보탤 수 있도록 기업과 공동 GP(Co-GP) 설립을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 9월 이재명 대통령이 주재한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서도 이런 요청이 잇따랐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스타트업에 돈을 줄 수 있는 곳은 벤처캐피털인데 금산분리로 대기업이 자유롭게 투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주 위원장은 이런 금산분리 규제 완화와 관련해 “기업들이 투자회사를 만들어 손자회사를 확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 미·중·일 정부, 첨단산업 투자 주도
기업들이 정부에 규제 완화를 요청하는 배경 중 하나는 첨단산업 간 경쟁이 국가 주도로 이뤄지고 있어서다. 미국 오픈AI의 스타게이트(450조원), 대만 TSMC의 미국 반도체 공장 건설(223조원) 등 한국과 직접 경쟁하는 미국, 중국, 일본, 대만은 정부가 AI와 반도체산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반도체업계 고위 관계자는 “첨단산업 ‘투자 속도전’에서 한번 뒤처지면 주도권을 놓칠 가능성이 크다”며 “기업들의 규제 완화 건의에 정부가 전향적으로 다가서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은/김보형/김형규 기자 hazz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