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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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의 핵심 산업 정책을 좌우하는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 내 생산 차량에 보조금과 공공조달 혜택을 몰아주는 이른바 ‘메이드 인 유럽’ 노선에 전격 합의하면서 한국 자동차 산업의 대 EU 수출에도 비상이 걸릴 조짐이다. 그동안 중국의 보복 관세를 우려해 프랑스의 보호무역주의에 제동을 걸어왔던 독일마저 자국 자동차 산업 위기 속에 프랑스 손을 맞잡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EU의 보호무역 법안인 ‘산업가속화법(IAA)’ 설계를 주도하는 프랑스를 상대로 한국을 유럽산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신뢰 파트너국’에 포함해 달라는 통상 방어전에 나섰다.

산업통상부는 4일 서울 풀만 앰배서더 호텔에서 김영만 통상정책국장과 토마 쿠르브 프랑스 경제재정부 기업총국장을 수석대표로 하는 ‘제21차 한·프랑스 산업협력위원회’를 개최했다. 지난 9월 정상 순방의 후속 조치로 마련된 이날 회의에서 산업부는 EU가 입법을 추진 중인 산업가속화법(IAA)과 관련해 한국이 ‘신뢰 파트너국’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의 적극적인 협조를 당부했다.

정부는 특히 지난달 16일 프랑스와 독일이 전격 합의한 ‘자동차 공동선언’에 대해 깊은 우려를 전달하고, 향후 EU 차원의 세부 기준을 만드는 과정에서 한국산 자동차가 차별받지 않도록 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양국은 이 문제를 상시 조율하기 위해 ‘한·프랑스 자동차 실무그룹’을 신설해 가동하기로 합의했다.

독일도 '유럽산 우대' 움직임 가세

지난달 16일 독일과 프랑스은 자동차 공동선언을 했다. 그동안 수개월간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여왔다. 프랑스는 중국산 저가 전기차 유입을 막기 위해 보조금과 공공조달에서 유럽 역내 조달(로컬 콘텐츠) 요건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중국 시장 의존도가 높은 독일 완성차 업계를 대변해 온 독일 정부는 자유무역 원칙 훼손과 통상 마찰을 이유로 이에 반대해 왔다.

하지만 폭스바겐이 창사 이래 처음으로 독일 내 공장 폐쇄를 검토하는 등 독일 자동차 생태계가 심각한 한계에 직면하면서 기류가 급변했다. 결국 양국은 서로의 핵심 요구를 주고받는 ‘패키지 빅딜’에 합의했다. 프랑스는 독일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2035년 내연기관 신차 퇴출 계획 완화’를 수용했다. 2035년 신차 탄소배출 감축 목표를 기존 100%에서 90%로 낮추고 나머지 10%에 대한 대체연료 투자 의무도 부과하지 않기로 물러섰다.

독일은 프랑스의 숙원이었던 IAA 내 자동차 분야 ‘메이드 인 유럽(역내 조달)’ 요건 강화를 수용했다. EU 의사결정의 양대 축인 독일과 프랑스가 이견을 봉합하고 공동전선을 구축하면서 향후 EU 집행위원회가 확정할 IAA 본법안과 범유럽 전기차 지원 제도에 고강도 역내 생산 요건이 반영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IAA 칼자루 쥔 프랑스

통상당국이 독·불 합의를 예의주시하는 또 다른 이유는 프랑스가 ‘유럽판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불리는 IAA 입법의 칼자루를 쥐어서다. EU 집행위에서 IAA를 비롯한 산업 전략과 역내 시장 정책을 총괄하는 인물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최측근인 스테판 세주르네 번영·산업전략 담당 수석부위원장이다.

프랑스는 이미 2023년 말 자국 전기차 보조금 제도를 개편하면서 배터리 제조와 완성차 해상운송 과정의 탄소배출량을 따지는 ‘환경점수제’를 도입한 바 있다. 사실상 유럽 역외에서 배로 실어 오는 차량에 불리한 기준을 매겨, 한국 공장에서 생산해 수출하던 현대차·기아의 주력 전기차들을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통상 전문가들은 프랑스가 IAA 입법을 통해 자국에서 먼저 실험한 ‘프랑스식 보호무역 모델’을 독일·스페인·이탈리아 등 EU 27개 회원국 전체의 공공조달 및 보조금 공통 규범으로 굳혀질 가능성을 우려한다. 이번 독·불 합의 직후 자동차 분야 ‘메이드 인 유럽’의 인정 범위를 일정 조건 아래 영국과 스위스 등 유럽 인접국까지 넓힐 가능성이 있어서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아시아 자동차 제조사들을 정조준한 장벽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울산, 광명서 제조하는 차량 영향 불가피

만약 프랑스식 역내 조달 장벽이 IAA를 타고 유럽 전역으로 확산할 경우 한국 자동차 및 부품업계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게 된다. 현대차와 기아는 각각 체코 노쇼비체 공장과 슬로바키아 질리나 공장을 가동하며 유럽 현지 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지만, 전기차 전환 과정에서는 여전히 국내 공장 수출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현재 체코 공장에서 현지 생산하는 코나 일렉트릭 등 일부 차종을 제외하면, 현대차 아이오닉5·아이오닉6·캐스퍼 일렉트릭과 기아 EV6·EV9·EV3 등 한국을 대표하는 전용 전기차 물량 상당수는 울산과 광명 등 국내 공장에서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된다. 유럽 각국이 기업용 법인차량(플릿) 구매 세제 혜택이나 공공조달, 신차 보조금을 줄 때 ‘유럽 역내 생산 및 역내 부품 일정 비율 이상 사용’을 의무화하면 한국산 수출 전기차의 가격 경쟁력은 급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정부가 사활을 걸고 있는 대목이 바로 IAA 법안 내 예외 조항인 ‘EU의 신뢰 파트너국’ 지정이다. 미국 IRA 협상 당시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 지위를 활용해 배터리 핵심광물 조달 요건 등에서 예외를 인정받았듯, 한·EU FTA 체결국이자 핵심 공급망 우방인 한국의 제품과 부품을 ‘유럽산’에 준해 동등하게 인정받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관철하려면 법안 초안과 세부 이행 규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 정부의 동의가 필수적이다.

정부는 프랑스를 상대로 단순한 ‘차별 면제’를 호소하는 대신, 프랑스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첨단 제조 공급망과 인공지능(AI) 기술 협력을 협상 지렛대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이날 양국이 신설하기로 합의한 한·프랑스 자동차 실무그룹은 기존 프랑스 전기차 보조금 개편 논의는 물론 향후 IAA 세부 기준 수립과 양국 간 배터리·전장 부품 공급망 협력을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 조율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는다. 한국 배터리·부품 기업과의 공급망 협력을 고리로 한국산 완성차에 대한 역내 차별을 막아내겠다는 복안이다.

이날 산업협력위와 동시에 열린 ‘제9차 한·프랑스 신산업 기술협력 포럼’ 역시 이 같은 통상·산업 연계 전략의 일환으로 보인다. 포럼에는 한국앤컴퍼니와 네이버클라우드, 프랑스의 대표 AI 기업인 미스트랄AI와 방산·우주항공 기업 탈레스코리아 등 양국 산학연 관계자 200여 명이 집결해 ‘제조 AX(MAX·제조업의 인공지능 전환)’와 ‘딥테크’ 협력을 논의했다.

프랑스는 기초과학과 AI 알고리즘, 항공우주 등 원천 딥테크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이지만 이를 대량 생산 공정에 접목할 제조 기반이 취약한 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업 공정 데이터와 양산 역량을 보유하고 있다. 실제 양국은 지난 10여 년간 24개 공동 연구개발(R&D) 과제에 531억원을 투입해 항공우주·철도 분야 AI 안정성 검증 기술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김영만 산업부 통상정책국장은 “이번 회의는 한·프랑스 수교 140주년 정상 간 합의를 기업·연구 현장의 실질적 협력으로 구체화한 계기”라며 “신설된 자동차 실무그룹과 산업협력위 등 정부 채널을 통해 통상 현안에 면밀히 대응하는 한편, 한국의 제조 데이터 기반과 프랑스의 AI·양자 등 딥테크 역량을 결합해 양국 협력을 지속 확대하겠다”고 말했다.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