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의 새 포장재 규제가 지난 8월 시행됐지만 국내 수출기업 10곳 중 8곳은 규제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자사 제품이 규제 대상인지 진단을 시작한 기업의 비중도 20%가 채 되지 않았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은 27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EU 포장 및 포장폐기물 규정(PPWR) 대응 실태와 과제’ 보고서를 발표했다. 지난 8월21일부터 9월2일까지 EU에 수출 중이거나 수출을 계획하는 기업 610개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다.

조사 결과 응답기업의 82.5%는 PPWR을 전혀 모르거나 개략적인 내용만 알고 있다고 답했다. 자사 제품에 규제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진단을 마쳤거나 진행 중인 기업은 16.7%에 그쳤다.

PPWR은 EU에서 발생하는 포장폐기물을 줄이고 재활용을 확대하기 위해 도입한 규정이다. 포장재에 들어가는 중금속과 식품 접촉 과불화화합물(PFAS)을 제한하고 기술문서와 EU 적합성 선언서 등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재활용성과 재생원료 함량, 포장 최소화 등의 의무도 단계적으로 강화된다.

PPWR은 지난 8월12일부터 시행돼 두 달이 넘었지만, 수출 기업 대부분은 규제 준수 여부를 입증하기 위한 자료 확보도 미흡한 것으로 조사됐다. 플라스틱 포장재를 사용하는 356개 기업 가운데 절반 이상은 재생원료 공급자의 증빙자료와 재활용성 평가, 확대생산자책임(EPR) 신고자료 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EPR은 제품 생산자에게 사용 후 포장폐기물의 수거·처리 비용 등 관리 책임을 지우는 제도다. PPWR에 따라 기업들은 적합성 입증뿐 아니라 EU 회원국별 등록·보고 등에 필요한 자료도 갖춰야 한다.

기업들은 내부 전문인력 부족을 가장 큰 애로로 꼽았다. 응답자의 32.3%가 전문인력 부족을 지적했고 시험·인증·컨설팅 비용 부담이 30.3%로 뒤를 이었다.

실제 기업 상당수는 규제 대응에 돈이 얼마나 들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일회성 투자비용을 산정하지 못한 기업이 49.3%, 매년 발생하는 반복비용을 산정하지 못한 기업은 54.1%였다.

추가 비용을 제품 가격에 반영하기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규제 대응 과정에서 추가 비용 발생을 예상한 577개사 가운데 81.6%는 이를 거래가격에 전혀 반영하기 어렵거나 25% 미만만 반영할 수 있다고 답했다. 전혀 반영하기 어렵다는 응답이 53.6%, 비용의 25% 미만만 전가할 수 있다는 기업은 28.1%였다.

무협은 기업의 준비 수준에 따라 지원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제언했다. 규제를 처음 접하는 기업에는 자사 제품의 적용 여부를 진단하고 대응 우선순위를 정하도록 돕고, 이미 진단에 착수한 기업에는 시험·평가와 증빙 보완, 기술문서 작성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비용 부담이 큰 기업에는 비용 산정 상담과 바우처를, 전문인력이 부족한 기업에는 실무교육을 연계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수출기업과 포장재 공급업체가 필요한 자료를 함께 점검하고 대체 소재 공급업체와 시험기관을 연결하는 등 공급망 차원의 지원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박소영 무협 수석연구원은 “PPWR 대응은 단순히 포장재를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적합성 입증과 공급망 관리까지 포함하는 과제”라며 “거래처가 요구하는 사항을 미리 파악해 증빙을 체계적으로 갖출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무협은 오는 29일 서울 삼성동 트레이드타워에서 ‘EU PPWR 시행에 따른 기업 대응 전략 세미나’를 열고 실태조사 결과와 인증 절차, 화장품·식품업계의 대응 사례 등을 공유할 예정이다.

이광식 기자 bumer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