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의 시간' 속에서 예술의 꽃을 탐하다
지난 25일 찾은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은 평소처럼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오르세미술관, 오랑주리미술관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전인 24일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대 41만 명(내무부 추산)이 길거리로 뛰쳐나오면서 주요 미술관이 안전을 위해 모두 문을 닫았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였다.

프랑스 사회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세계 문화 수도’ 파리의 위상은 건재하다. 올해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린 국제 미술 장터인 ‘아트바젤 파리’는 2022년 처음 열린 지 불과 4년 만에 쟁쟁한 경쟁자인 영국의 프리즈 런던보다 중요한 미술시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장에서 만난 미술 관계자들은 “아트바젤의 원조인 스위스 아트바젤 인 바젤도 넘어서서 세계 최고 시장으로 등극했다”고 한목소리로 말했다.

이를 가능케 한 건 파리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아트페어가 열리는 장소부터가 그렇다. 1900년 만국박람회를 위해 보자르 양식으로 지은 그랑팔레는 유럽 최대 규모의 유리 지붕으로 자연광이 쏟아지는 화려한 전시관이다. 폴 세잔과 앙리 마티스를 비롯해 미술사의 수많은 거장이 이곳에서 전시를 열었다. 근처에는 오르세미술관, 프티팔레 등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있다. 공원에 친 큰 천막에서 아트페어를 여는 프리즈 런던, 평범한 컨벤션센터에서 열리는 아트바젤 인 바젤과 대조적이다.

전 세계에서 미술 애호가가 몰려드는 ‘아트위크’를 맞아 파리 미술관들은 자산인 명작들을 활용해 새로운 전시를 시도했다. 그랑팔레는 퐁피두센터와 손잡고 세잔이 후대 화가들에게 끼친 영향을 조명하는 전시를 열었다. 개관 40주년을 맞은 오르세는 미국 작가 제니 홀저의 LED와 설치작품을 19세기 대가들의 작품 사이사이에 배치했고, 프티팔레와 오르세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화가 에바 곤잘레스와 메리 카사트를 각각 주인공으로 세웠다.

명품 브랜드들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아트바젤 파리가 브랜드를 ‘슈퍼리치’들의 뇌리에 각인시킬 가장 화려한 무대기 때문이다. 파리 아트위크에서 만난 최고의 명작과 명품들을 정리했다.

시대에 가려졌던 女 인상파 화가들…100년 만에 빛을 보다
19세기 과소평가됐던 여성 작가들, 파리 아트위크서 스포트라이트

(왼쪽) 에바 곤잘레스 ‘전신 거울’(1869~1870년께). /런던 내셔널갤러리 제공, (오른쪽) 에바 곤잘레스 ‘이탈리앵 극장의 관람석’(1874). /오르세미술관 제공, (위) 메리 커샛 ‘졸린 아이를 씻기려는 어머니’(1880).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제공, (아래) 메리 커샛 ‘관람석의 여인’(1879). /필라델피아미술관 제공
(왼쪽) 에바 곤잘레스 ‘전신 거울’(1869~1870년께). /런던 내셔널갤러리 제공, (오른쪽) 에바 곤잘레스 ‘이탈리앵 극장의 관람석’(1874). /오르세미술관 제공, (위) 메리 커샛 ‘졸린 아이를 씻기려는 어머니’(1880).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 제공, (아래) 메리 커샛 ‘관람석의 여인’(1879). /필라델피아미술관 제공
“나는 독립적이다! 혼자 살 수 있고, 일하는 게 좋다.” 미국 출신 인상주의 대가 메리 커샛(1844~1926)은 이런 말을 남겼다. 평생 미혼으로 살며 ‘왜 결혼하지 않느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질문에 시달린 끝에 내놓은 답이다. 지금 프랑스 파리 오르세미술관에서는 그를 조명하는 전시 ‘메리 커샛, 독립적인 여성’이 열리고 있다. 그림과 파스텔, 판화 등 약 80점을 소개하는 대규모 전시다.

파리 프티팔레에서도 여성 화가를 소개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에바 곤잘레스(1847~1883)를 조명하는 ‘자유로운 화가의 길’이다. 그림과 파스텔, 판화 약 100점이 나온 이번 전시는 1885년 사후 회고전 이후 최대 규모다. 그도 첫 스승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미혼 여성이 작업실을 따로 얻는 건 적절치 않아.”

마네와 모네 등이 활동한 19세기 말, 화가는 남자의 일이었다. 1880년 파리 살롱에 그림을 낸 작가 중 여성은 12.5%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 ‘파리 아트위크’에 두 미술관은 미술사에서 과소평가된 여성 작가들의 전시를 꺼내 들었다. 전 세계 미술 애호가를 맞이할 간판으로 과거 작가를 재조명하는 ‘오래된 새로움’을 내건 것이다.

‘메리 커샛, 독립적인 여성’展
오르세미술관, 내년 1월 31일까지

커샛이 화가의 꿈을 품고 파리에 처음 온 건 1865년, 스물한 살 때였다. 하지만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 입학을 거절당했다.

1877년 국가 공식 미술전인 살롱에 출품을 거절당한 커샛에게 선배 화가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발레리나 그림으로 유명한 에드가 드가(1834~1917)였다. “화가들끼리 여는 인상파 전시에 함께하지 않겠나?” 커샛은 망설이지 않고 기회를 잡았고, 이후 인상파의 길을 걸었다.

커샛의 명성을 가장 널리 알린 건 1889년부터 즐겨 그린 ‘어머니와 아이’ 그림이다. 커샛이 미혼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하다. 비평가와 미술상도 커샛을 ‘아이와 어머니를 그리는 화가’로 불렀다. 하지만 그림 속 ‘어머니’는 실제로는 유모인 경우가 많았다.

한때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커샛은 1894년 파리 북서쪽에 있는 보프렌성(城)을 샀다. 그림으로 번 돈에 미국 시카고 만국박람회 여성관 벽화 주문 대금을 합쳐서 구입했다. 당시 여성 화가가 자기 수입으로 이처럼 부동산을 사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1901년 프랑스 인구조사 기록에 커샛은 ‘미국인, 가구주, 화가, 사장’으로 적혀 있다.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오직 실력 하나로 인정받은 것이다. 오르세미술관 전시는 그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전시는 내년 1월 31일까지.

‘에바 곤잘레스, 자유로운 화가의 길’展
프티팔레, 내년 1월 24일까지

인상파의 ‘큰형님’ 에두아르 마네(1832~1883)에게 제자는 딱 한 명, 곤잘레스뿐이었다. 존경하는 선배에게 제자가 생겼다는 사실에 질투를 느낀 후배 화가도 있었다. 마네를 내심 사모한 인상파 화가 베르트 모리조가 그랬다. 모리조는 마네가 곤잘레스의 모습을 그리는 장면을 보고 언니에게 편지를 썼다. “마네는 곤잘레스 양의 초상화를 스무 번째 다시 그리는 중이야. 저녁마다 얼굴을 지우고 다시 그리더라.”

하지만 곤잘레스는 스승의 그림자에 가려질 생각이 없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그림 실력을 다듬었다. 그런데도 대표작 ‘이탈리앵 극장의 관람석’(1874)은 살롱 전시에 탈락하고 말았다. 마네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마네의 나쁜 영향이 드러난 그림”이라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1879년 판화가 앙리 게라르와 결혼한 곤잘레스는 4년 뒤 아들을 낳고 서른여섯 살의 나이에 출산 후유증으로 숨졌다. 그 뒤 곤잘레스의 그림은 차츰 잊혔고 그의 이름 앞엔 주로 ‘마네의 유일한 제자’라는 말이 붙었다. 하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화가 곤잘레스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전시는 내년 1월 24일까지.

파리=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