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피아니스트 마르크-앙드레 아믈랭(65·사진)이 오늘날 피아노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독보적이다. 어려운 곡을 능숙하게 다루면서도 진흙 속 진주 같은 곡을 발굴해 피아노로 연주할 수 있는 음악의 범위를 꾸준히 넓혀 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베토벤, 쇼팽, 브람스 같은 정통 레퍼토리뿐 아니라 알캉, 헨젤트, 로슬라베츠, 그레인저, 제프스키 등 상대적으로 연주 기회가 적은 음악들이 그의 손을 거쳐 생명력을 얻었다.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며 그가 내놓은 앨범만 92장. 그가 직접 쓴 작품도 30곡이 넘는다.

한국경제신문 아르떼가 지난 9월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리허설을 마친 아믈랭을 만나 생소한 악보 사이에서 끊임없이 좋은 곡을 갈구하는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좋은 음악이니까요. 저는 이 작품들이 청중에게 어려운 음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지 않아요. 저 역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서 연주한 것이니까요. 그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좋은 음악을 소개하고 싶을 뿐입니다.”
ⓒBen Ealovega
ⓒBen Ealovega

악보 수만 장 사이에 숨은 보석을 찾아

아믈랭은 피아노 음악의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알려줬다. 악보 수집가인 친구 이야기를 소개했다. 그 친구는 여러 해 동안 희귀 피아노 악보를 PDF 파일로 모아 다른 수집가와 공유해 왔단다. 그렇게 확보한 작품 수가 무려 8만2000여 개. 아믈랭은 “피아노 레퍼토리는 사실상 무한하다”며 “아직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 정말 많다”고 강조했다. 그에게 악보를 읽는 일은 익숙한 작품을 다시 확인하는 작업이자 미지의 음악을 탐험하는 과정이란 말이다.

이런 선택이 연주자로서 성공하는 데 유리했던 것은 아니다. 아믈랭은 경력 초기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어려웠다고 털어놨다. “처음엔 연주회 기회를 얻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레퍼토리에 관해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었죠.” 이때 도움이 된 건 음반이었다. 공연장에서 접하기 어려운 작품을 손수 녹음하며 자신의 음악을 알렸다. 그런 노력이 계속되자 사람들이 조금씩 아믈랭이 발굴한 곡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청중이 낯선 음악을 접할 때 느낄 심리적 장벽을 알고 있다. “관객은 자신이 모르는 작품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무리 듣기 좋아도 모르는 곡이라면 굳이 돈을 써서 티켓을 사고 공연장에 오려 하지 않죠. 그러니 젊은 연주자들이 자주 연주되는 곡으로 커리어를 쌓으려 하는 것도 이해는 됩니다. 다만 그럴 경우 다른 피아니스트와 비교당하기 쉬워요. 최근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연주하려는 젊은 피아니스트가 많아졌는데, 전 이게 좋은 트렌드가 됐으면 합니다.”

“월광 소나타에도 새로운 해석 가능성 있어”

낯선 음악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처럼 누구나 아는 곡도 자주 연주한다. 수백 년간 널리 연주된 작품에서도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잘 알려진 작품을 연주할 땐 청중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길 바랍니다. 알려지지 않은 작품에선 발견의 기쁨 자체를 전하고 싶고요.”

아믈랭은 “시대에 따라 음악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질 뿐 인간이 음악에 담는 감정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대음악의 불협화음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본다. “작곡가 중에 ‘관객이 자기 음악을 싫어했으면 좋겠어’라고 생각하며 작곡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불협화음도 작곡가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인 거죠.”

작곡할 땐 바카롤레(뱃노래), 샤콘, 에튀드처럼 과거의 음악 형식을 빌려와 제목에 붙이기도 한다. 아믈랭에게 전통은 벗어나야 할 제약이 아니라 새로움을 창조하는 재료다. “현대 작곡가는 과거의 작곡가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과거 음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죠. 제 음악도 전통적 음악이 깃든 과거에 기반하고 있고요.”

테크닉 대신 ‘피아니즘’

아믈랭은 자신의 음악을 소개할 때 흔히 쓰이는 ‘테크닉’이란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다. 테크닉이 연주 속도와 정확성만을 의미하는 단어처럼 쓰이는데 실제로는 그보다 더 넓은 범주로 보기 때문이다. “테크닉이란 용어는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피아니즘(pianism)이나 머캐닉스(mechanincs)로 표현해야 할 걸 그렇게 쓰는 거죠. 전 피아니즘이란 표현을 선호합니다. 우리가 (기술적 의미에 국한된) 테크닉이라고 부르는 건 사실 머캐닉스로 부르는 게 맞을 겁니다.”

연습에서도 그는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시간으로만 따지지 않는다. 아믈랭은 “하루 7~8시간 연습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이해하게 됐느냐’다”고 했다. “산책할 때 최고의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해요. 음악을 깊이 고민하고 음악 자체에 대해 순수하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죠.”

젊은 음악가들이 등용문으로 삼는 콩쿠르에 대해선 5초간 고민하더니 신중한 견해를 드러냈다. “프로모션엔 엄청난 도구죠. 하지만 ‘음악가에게 도움이 될까?’ 싶긴 합니다. 콩쿠르는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라 경쟁하는 곳이에요. 그게 아티스트가 표현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믈랭이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이 악단에 대해 “아주 조화롭게 협업하는 음악가들이 인상적”이라며 “더 나아지기 위해 언제나 기꺼이 변화하려 한다”고 평했다.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와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협연한 곡은 그가 “40여 년간 함께한, 오랜 친구 중 하나”라고 설명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이었다. 아믈랭은 이달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이탈리아 독일 영국 덴마크 폴란드 등을 돌며 세계 곳곳에서 관객을 만난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