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10월 25일 오전 2시30분. 북해 한복판의 시추선 오션바이킹에서 낯선 기름 냄새가 퍼졌다. 해저 3000m 아래에서 끌어올린 시추 진흙에 갈색 띠가 나타났다. 어업과 해운으로 먹고살던 노르웨이의 운명을 바꿔놓은 에코피스크유전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다.

이달 중순 찾은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는 1인당 국민소득이 10만달러에 육박하고, 3200조원 규모 세계 최대 국부펀드를 거느린 나라의 수도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소박했다. 왕궁과 중앙역을 잇는 번화가 카를요한 거리엔 19세기 세워진 국립극장과 의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석유가 터져나오기 훨씬 전부터 도시를 지킨 건축물이다.

"석유 판 돈 쓰자" 여론 뿌리쳤다…미래 위한 노르웨이의 '절제'
석유 발견 이후 노르웨이의 경제적 위상은 극적으로 달라졌다. 1970년 노르웨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이웃 스웨덴보다 약 30% 적었는데 지난해 1.5배로 커졌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9만7310달러로 북유럽 5개국 가운데 가장 높다.

석유를 발견한 것이 행운이었다면 이를 번영의 기반으로 바꾼 힘은 ‘절제’였다. 노르웨이는 “자원은 미래를 위해 쓴다”는 원칙을 정했다. 석유로 벌어들인 돈은 국부펀드에 쌓아 해외에 투자하고 국내 재정에 쓰는 돈은 엄격하게 관리했다. 원금에 손대지 않고 펀드의 예상 실질수익률(3%) 이내에서만 인출하는 재정준칙도 도입했다. 울프 스베르드루프 노르웨이 BI경영대 교수는 “오디세우스가 세이렌의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돛대에 묶은 것과 같다”고 했다.

노르웨이는 자원의 저주를 경험한 네덜란드를 반면교사로 삼았다. 네덜란드는 1959년 발견된 천연가스전 때문에 홍역을 치렀다. 정부의 무분별한 지출 확대에 물가와 임금이 치솟았다. 천연가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가 쏟아지면서 길더화 가치가 치솟자 산업 경쟁력이 크게 훼손됐다. 1980년대 초반 경제는 역성장했고 실업률은 10%에 육박했다. 1977년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네덜란드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노르웨이에 석유가 있다면 한국에는 반도체가 있다. 에픽AI 컨센서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올해부터 2028년까지 벌어들일 누적 합산 영업이익은 약 2640조원에 달한다. 1971년부터 2025년까지 노르웨이가 석유·가스를 수출해 번 16조7000억크로네(약 2370조원)보다 많다. 많은 이가 반도체 호황을 ‘자원의 저주’가 아니라 ‘미래 세대의 희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노르웨이와 네덜란드가 준 교훈을 찾아 나선 이유다. 호황의 과실을 미래 세대의 자산으로 바꾸겠다는 의지, 이를 지켜낼 정치·제도적 절제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간이다.

유전 발견 후 '자원의 저주' 겪어…초당적 합의로 석유기금 마련
석유로 번 돈, 국내 직접투자 금지…高물가 막고 자국 수출산업 지켜

지난 6월 대만 중앙은행은 “대만 경제에는 ‘네덜란드병’ 현상이 없다”고 공식 발표했다. 모든 국가 역량이 TSMC와 반도체 공급망에 쏠려 다른 산업 경쟁력이 약화하고 양극화가 심해질 것이라는 우려를 반박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대만에서 네덜란드병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반도체도 ‘자원의 저주’를 부를 수 있을까. 치열한 기술 개발과 막대한 설비 투자의 결과물인 반도체산업을 땅속에서 캐내는 천연자원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특정 산업에 돈과 사람이 쏠리고, 호황기에 늘어난 이익과 세수를 영구 수입으로 여기면 자원의 저주는 남 일이 아닐 수 있다.

노키아에 의존하던 핀란드는 주력 산업 쇠퇴에 장기 침체를 겪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빅테크 및 제약 기업 세수에 의존하는 아일랜드도 네덜란드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의약품 수출 호황이 임금 상승으로 이어져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한 산업의 성공이 국가의 지속적인 번영을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경고다.

횡재한 자원 부국의 운명을 가른 건 얼마를 벌었는지보다 번 돈을 어떻게 썼는지다. 노르웨이는 석유 관련 수입 대부분을 해외에 분산 투자하고 국내 지출은 제한했다. 네덜란드는 천연가스 대박의 후유증을 노사 합의로 극복해 생산성을 회복했다. 한국경제신문은 모처럼 찾아온 반도체 초호황을 미래 세대의 지속 가능한 번영으로 이어가기 위한 조건을 찾기 위해 이처럼 자원의 저주를 극복한 나라들을 현장 취재했다.
"석유 판 돈 쓰자" 여론 뿌리쳤다…미래 위한 노르웨이의 '절제'
노르웨이도 1969년 에코피스크 유전 발견 직후 ‘자원의 저주’를 경험했다. 정부는 석유 관련 수입이 본격화하기도 전에 미래 수입을 담보로 재정지출을 늘렸다. 각종 토목 사업과 공공 부문 일자리 창출, 복지 확대에 돈을 썼다. 이에 물가와 임금이 급등하고 조선업, 어업 등 전통 제조업 경쟁력이 약화했다. 정신을 차린 계기는 1986년 유가 폭락이었다. 부동산 거품 붕괴에 따른 대출 부실로 대형 은행 세 곳이 국유화됐고 실업률은 6% 가까이로 치솟았다.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1990년 석유기금법을 제정했다. 재정이 흑자로 돌아선 1996년 자금 적립을 시작했다. 석유로 얻은 부를 미래 세대를 위한 금융자산으로 바꿔 세계 금융시장 큰손으로 부상한 출발점이었다.

◇ 여야가 지켜낸 절제의 원칙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만난 현지 경제·금융 전문가는 이런 변화의 비결로 여야가 어렵게 이뤄내고 지켜온 ‘절제의 정치’를 꼽았다. 석유기금을 마련하기로 한 노르웨이는 여야 합의에 앞서 정부 내부의 반대부터 넘어야 했다. 1989년 아르네 스카우게 당시 보수당 소속 재무장관이 기금 설립을 추진하자 재무부 관료들이 제동을 걸었다. 정치권이 기금을 ‘제2 예산’처럼 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스카우게 장관은 직접 법안을 쓰겠다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 대신 재무부는 자국 내 지출을 의회가 통제하는 원칙을 관철했다.

돈이 쌓이자 더 거센 유혹이 찾아왔다. 2001년 국민의 64%가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더 쓰길 원한다는 여론조사가 나왔다. 당시 노동당 정부를 이끌던 옌스 스톨텐베르그 총리는 재무부 관료들과 지출 원칙을 마련하고 내각, 의회, 노동계를 설득했다. 석유 관련 수입을 기금의 예상 실질수익률 범위에서만 정부 예산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4% 준칙’이 탄생했다. 2017년 예상 수익률이 하락하자 준칙 기준도 3%로 낮아졌다.

재정준칙은 절대적 지출 상한이 아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어도 정당들은 스스로 원칙을 지켰다. 코로나19 당시 한시적으로 지출을 늘리면서도 장기 규율은 유지했다. 절제는 막대한 금융자산으로 돌아왔다. 1996년 약 20억크로네로 출발한 기금은 지난 6월 말 22조6830억크로네(약 3200조원)로 30년 만에 1만 배 넘게 불어났다. 한 번 쓰면 사라질 석유 관련 수입을 세대에 걸쳐 수익을 낳는 투자자산으로 바꾼 것이다.

◇ 해외 투자로 세운 경제 방화벽

노르웨이가 국부를 키운 또 다른 비결은 자국 경제를 오일머니로부터 지켜낸 ‘경제 방화벽’이다. 국부펀드의 자국 직접 투자를 금지하고 해외에 분산 투자하도록 했다. 막대한 돈이 국내에 풀리면 물가와 임금이 오르고 다른 수출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어서다. 1960년대 말부터 천연가스 수입을 대규모 재정지출로 돌리다 제조업이 위축된 네덜란드 사례는 이 같은 경계감에 힘을 실었다.

그렇다고 석유로 벌어들인 돈을 자국에 전혀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석유·가스 사업에서 세금과 배당금 등으로 확보한 재원은 기금에 쌓고, 학교와 병원·도로에 필요한 돈은 재정준칙에 맞춰 의회가 승인한 예산에서 지출한다. 올해 정부가 석유·가스 사업에서 거두는 순수입은 약 95조원으로 전망된다. 이 중 재정준칙에 따라 산정한 기금 활용 기준액은 약 83조원이다.

해외 투자는 정치적 방화벽이기도 하다. 기금이 자국 기업과 특정 지역 개발 사업에 투자되지 않도록 해 정당과 지역의 이해관계가 운용에 끼어들 여지를 줄였다. 자국 경제가 감당할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세계 금융시장에서 굴리는 원칙이 정치적 압박까지 차단한 셈이다.

언젠가는 자원이 고갈될 노르웨이와 반도체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한국에 똑같은 원칙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호황의 과실을 미래 세대 자산으로 남길 제도와 이를 지키는 정치적 합의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외위스테인 올센 전 노르웨이중앙은행 총재는 “석유로 얻은 부는 현세대만의 것이 아니라 미래 세대와 나눠야 할 자산이라는 공감대가 확산했다”며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점은 특정 제도와 숫자가 아니라 핵심 원칙에 관해 정치적 합의를 이뤄내고 이를 지키는 문화”라고 강조했다.

오슬로=민경진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