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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보이지 않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김승연 넥스트증권 대표
알아서 듣는 줄 알았던 약은 사실 몸속에서 제 상대를 만나야 효과를 낸다. 많은 약은 특정 단백질과 맞물려 그 작용을 막거나 돕는다. 열쇠와 자물쇠처럼 서로 꼭 들어맞아야 한다. 그 상대인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길게 이어진 사슬이 접힌 입체 구조다. 이 모양에 따라 근육을 움직일지, 신호를 전할지, 세균과 싸울지가 정해진다. 사슬이 잘못 접히면 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약을 만들 때는 병과 얽힌 단백질의 생김새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아미노산 순서를 알아도 사슬이 어떻게 접힐지는 오랫동안 짐작하기 어려웠다. 구조 하나를 실험으로 밝히는 데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구글 딥마인드의 ‘알파폴드’는 반세기 가까이 풀리지 않던 이 문제에 AI로 답을 내놓았다. 아미노산 순서만으로 3차원 구조를 예측해낸 것이다. 2022년에는 알려진 거의 모든 단백질의 예측 구조 2억 개가 공개됐다. 누구나 무료로 볼 수 있다.
2024년 나온 알파폴드3는 단백질이 DNA·RNA나 약물 분자와 어떻게 결합하는지까지 그려 낸다. 그렇다고 컴퓨터에서 잘 맞는 물질이 곧 좋은 약이 되지는 않는다. 안전성과 효과는 실험과 임상시험으로 확인해야 한다. AI가 바꾼 것은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그 출발점은 이제 누구에게나 같다. 어느 연구실에서든, 대학생의 노트북에서든 같은 예측 구조를 볼 수 있다. 연구 문턱이 그만큼 낮아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출발할 때 차이는 어디서 생길까. 그 물음 앞에서 두 달 전 에세이 첫 회에 쓴 글이 떠올랐다. AI가 흔하디흔한 모래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였다. 모래를 지능으로 바꾼 것은 사람이었다. 지금은 AI가 글을 쓰고, 계산하고, 주문을 내는 일에 이어 보는 일까지 모래처럼 흔하게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일에 답을 내놓는다.
답이 흔해질수록 귀해지는 것이 있다. 좋은 질문이다. 같은 예측 구조를 앞에 두고도 어떤 병의 어떤 단백질을 들여다볼지는 질문이 정한다. 차이는 거기서 생긴다. 투자도 다르지 않다. 시세와 뉴스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쏟아진다. 그래서 우리가 넥스트증권에서 AI로 만들고 있는 것은 더 많은 정보가 아니다. 투자자가 자기 질문에서 출발해 필요한 것을 골라 보고, 스스로 확인한 뒤 결정하도록 돕는 도구다.
생각해 보면 약 한 알도 그렇게 만들어진다. 삼키는 데는 몇 초면 충분하지만, 그 한 알에는 긴 시간이 담겨 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들여다보며 끊임없이 묻고, 검증하는 시간이다. AI가 몇 초 만에 답을 내놓는 시대에도, 그 시간만큼은 건너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