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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미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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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서에 분명히 적혀 있었다. 분쟁이 생기면 중재로 해결한다고. 그런데 막상 분쟁이 터지자 중재기관이 선정한 단독 중재인은 스스로 이 사건을 심리할 관할권이 자신에게 없다고 판정했다. 분쟁은 있었고 중재합의도 있었지만, 중재는 없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불운한 결과가 아니다. 처음부터 예고된 결말이었다. 계약서의 중재조항에서 핵심 한 가지가 빠진 탓이었다.

사건: 중국 거래처가 대금을 끊었다



국내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A사(이하 '신청인')는 중국 유통업체 B사(이하 '피신청인')와 독점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10년 가까이 거래를 이어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피신청인의 대금 입금이 늦어지더니 결국 완전히 끊겼다. 미수금은 수억원에 달했다. 신청인은 계약서의 분쟁 해결 조항을 근거로 국제중재를 신청했다.

계약서 조항은 이랬다:
This contract shall be governed by all laws of the Korea. Both parties shall submit to binding arbitration in the Korea for resolution of disputes.

짧고 간결했다. 준거법은 한국 법, 분쟁은 한국에서 중재로 해결한다. 신청인은 이 조항이 자신에게 국제중재를 신청할 권리를 준다고 믿었다.

무엇이 빠져 있었나 — 부실한 조항의 해부



당사자 입장에서 이 조항의 문제를 선뜻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중재합의는 분명히 존재하고, 한국법이 준거법이라는 점도 명확하다. 그런데 딱 거기까지다.

'한국에서 중재한다'는 말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중재기관이 어디인지, 어떤 규칙으로 진행하는지, 중재인은 몇명인지, 언어는 무엇인지 등 국제중재절차를 진행하기 위해 정해져야 할 중요한 것들에 대해 이 조항은 아무것도 정해주지 않는다.

중재기관 사무국은 신청인에게 이 조항이 가진 문제를 충분히 설명했다. 특정 기관을 명시하지 않는 조항이라는 점, 그에 따라 관할권 다툼이 생길 수 있다는 점을 고지했다. 그러나 신청인은 달리 방도가 없었다. 사문화된 채권을 그대로 묻어둘 수도 없었던 신청인은 일단 중재를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리스크를 알면서도 지푸라기를 잡은 것이었다.

한국에는 실제로 여러 국제중재기관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유일한 상설 법정 중재기관인 대한상사중재원(KCAB) 뿐 아니라 ICC, SIAC, HKIAC 등 해외 기관들도 한국 관련 사건을 처리한다. 이중에는 서울에서 분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는 곳들도 있다. 피신청인 측은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한국에서 중재한다'는 말이 특정 기관을 지정하지 않으므로, 특정 기관이 자신에게 관할권이 있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런 조항을 '임의중재조항' 혹은 '비기관중재조항'이라 부른다. 중재에 합의하긴 했지만 이를 운영할 기관을 명시하지 않은 것이다. 학계와 실무에서는 이보다 더 강한 표현도 쓰인다. 국제중재 세계에서는 이처럼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조항을 병리적 조항(pathological clause)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항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활용하기에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는 뜻이다.

피신청인의 반격: 관할권 도전과 중국 법원 선제 소송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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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신청인은 중재 절차에 응하면서 동시에 두 가지 카드를 꺼냈다. 첫째, 계약이 기간 만료로 이미 종료됐으므로 중재합의 자체가 소멸했다는 주장이었다. 둘째, 설령 계약이 유효하더라도 해당 중재조항은 특정 기관을 명시하지 않아 무효이므로 이 사건을 심리할 수 있는 중재기관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여기에 더해 피신청인은 중국 현지 법원에 선제적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현지 법원은 해당 중재조항이 무효라는 취지로 사건을 수리했다. 아직 본안 판단이 아니더라도, 이 사실은 중재판정부에 대한 압박 수단이자 피신청인 논리를 뒷받침하는 서사로 활용됐다.

중재인의 판단: '기관이 명시되지 않았다'



중재기관은 이 사건을 신속절차(Expedited Procedure)로 진행했다. 신속절차에선 양 당사자가 별다른 합의를 하지 않는 이상 중재기관이 직접 단독 중재인을 선정한다. 양 당사자가 한국 기업과 중국 기업이었던 만큼,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않는 제3국적 중재인을 선정하는 것이 고려 사항이었다. 최종적으로 선정된 단독 중재인은 유럽 국적의 국제중재 전문가였다.

단독 중재인은 계약 만료 주장은 기각했다. 갱신 계약이 체결됐다는 증거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쟁점(중재기관의 특정 여부)에선 피신청인의 손을 들어줬다.

이 구매계약 제11조의 중재합의는 어떠한 중재기관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조항은 단지 '한국에서의 중재(arbitration in the Korea)'를 언급할 뿐이다. 이는 한국중재법에 따른 특정 기관이나 규칙의 지정 없이 한국에서 진행되는 임시중재(ad hoc arbitration)에 대한 합의로 보인다.

중재인은 한국 중재법이 특정 기관을 부록에 명시하고 있으며 이것이 유일한 관련 조항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실 만으로 당사자들이 그 기관을 지정했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중재합의가 어떤 기관이든 '기관'을 조금이라도 언급했다면 다른 결론이 가능했겠지만, 조항은 그 어떤 기관의 이름도, 단서도 남기지 않았다.

이 판단이 완전히 납득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한국 중재법이 명시적으로 참조하는 유일한 기관이 존재하고, 계약 당사자들이 '한국의 구속력 있는 중재'를 선택했다면, 그것이 결국 한국 법이 지정한 기관 혹은 한국 내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중재기관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논리도 충분히 성립한다.

그러나 이 논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독 중재인은 스스로 관할권이 없음을 선언하고 신청을 기각했다. 중재법은 중재판정부에 자신의 관할권 존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 이른바 '자기 관할 결정권(competence-competence)'을 부여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 중재인은 바로 그 권한을 행사해 '나는 이 사건을 심리할 수 없다'고 판정한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면 — 임시중재와 선정기관 요청



이 상황에서 신청인에게 남아 있던 이론적 선택지가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기관중재를 주장하는 대신, 임시중재(ad hoc arbitration)임을 인정하고 중재기관에 선정기관(appointing authority)으로서의 역할만 맡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즉, 기관이 절차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중재인 선정 등 제한된 기능만 담당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어떤 기관이 심리를 맡느냐'가 아닌 '누가 중재인을 선정하느냐'의 문제가 되므로, 기관 지정 여부에 관한 관할권 다툼을 비껴갈 여지가 생긴다.

그러나 이 방법도 현실 앞에서 무너졌을 가능성이 크다. 선정기관 역할을 맡기는 것조차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미 중재의 모든 측면을 다투고 있는 피신청인이 '그럼 그 역할만 맡는 건 동의한다'는 사후합의를 해줄 이유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신청인이 이 경로를 처음부터 선택했다면 최악의 결과는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관할권 다툼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전략을 바꾸기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부실한 조항이 쳐 놓은 그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보다 좁았다.

관할권을 넘어도 위험은 남는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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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관할권 단계에서 끝났지만, 부실한 중재조항의 위험은 설령 관할권 판단을 통과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다.

중재 절차가 진행돼 판정이 내려졌다 하더라도, 그 판정을 외국에서 집행하려 할 때 문제가 다시 불거진다. 뉴욕협약에 따른 집행 거부 사유 중에는 '중재합의가 무효인 경우'가 포함된다. 어렵사리 관할권 단계를 통과한 임의중재 판정이라도, 집행지 법원이 해당 중재합의의 유효성 또는 기관 특정 여부를 문제 삼으면 집행 자체가 좌초될 수 있다.

또한 중재지인 한국 법원에서도 중재판정 취소 신청이 가능하다. 중재합의의 유효성과 중재판정부 구성의 적법성은 취소 사유에 포함된다. 관할권 판정을 넘겼다고 해서 법적 분쟁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부실한 조항은 그 하자를 달고 판정까지 따라온다.

결과적으로 부실한 중재조항으로 시작된 분쟁은 — 관할권 다툼, 병행 소송, 판정 후 집행 거부, 중재판정 취소 신청 — 이 모든 전선에서 비용과 시간을 갉아먹는다. 처음부터 중재로 신속하게 해결하겠다는 목표는 오히려 멀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 법률 대리, 시간, 그리고 기회



신청인은 국제중재 절차 전반에 걸쳐 법률 대리인 없이 스스로 대응했다. 사내 담당자가 관할권 항쟁에 맞서 서면을 작성하고 논리를 갖춰 제출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국제중재 절차에서 법적 쟁점을 자력으로 다루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중재 신청 비용, 관할권 판정까지의 절차 비용, 그 과정에서 소요된 시간 — 이 모든 것이 낭비됐다. 미수금 채권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를 회수할 수단을 잃었다. 계약을 체결하던 시점에 조항 하나를 제대로 썼다면, 치르지 않아도 됐을 대가였다.

중재조항은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중재조항은 분쟁이 생겼을 때 비로소 꺼내 읽게 된다. 계약이 잘 이행되는 동안은 아무도 거기 적힌 내용을 따져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계약서를 작성할 때 이 조항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검색해서 나온 표준 문구를 붙여 넣거나, 상대방이 제안한 문안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중재로 해결한다'는 한 문장만 남겨두고 넘어간다.

이 사건의 중재조항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중재합의는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부실한' 조항이었기 때문이다.

중재조항에 반드시 담겨야 할 것은 세 가지다. 준거법, 중재지, 그리고 중재기관과 적용 규칙. 이 세 가지가 명확하지 않으면 중재합의는 있어도 중재는 없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중재인의 수나 언어는 정하지 않더라도 절차 개시 후 결정이 가능하지만, 이 세 가지는 계약서 작성 시점에 확정되어 있어야 한다. 누락이 발견되는 것은 언제나 분쟁이 터진 이후다.

분쟁이 생겼을 때 '계약서를 다시 쓸 수 있었다면'이라는 후회는 이미 늦다. 국제거래 계약서라면 사전에 중재조항을 반드시 써야 하는 것도 맞지만, 그거로는 충분하지 않다. ‘잘’ 그리고 ‘제대로’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