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여의도 시범아파트
1971년 가을 서울 여의도의 새 아파트 승강기 앞에 제복 차림 안내원이 서 있었다. 24대의 승강기를 이용하는 주민에게 안내하기 위해 배치된 ‘엘리베이터걸’만 98명이었다. 서울시가 내건 분양 광고도 흥미롭다. “갖는 자랑, 사는 즐거움, 꿈이 있는 마이홈.” 마당 있는 단독주택이 선망의 대상이던 때, 12층 아파트를 미래 주거로 내세운 것이다.

한강 모래벌판에 들어선 24개 동, 1584가구의 아파트 단지는 말 그대로 실험이었다. 사람들은 1년 전 와우아파트 붕괴를 생생히 기억했다. 서울시는 아파트의 모범을 보이겠다며 이름에 ‘시범’을 붙였다. 엘리베이터와 중앙난방, 급수시설을 갖춘 국내 첫 고층 대단지였다. 판상형 동 배치, 복도식 평면, 단지 안 녹지와 어린이 놀이터는 한국 아파트의 표준이 됐다. 그해 10월 29일 준공 테이프는 박정희 대통령이 끊었다.

값은 만만치 않았다. 가장 작은 주택형의 분양가가 212만원으로, 당시 공무원 초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10년 넘게 모아야 하는 돈이었다. 그래도 입주 직후 웃돈이 붙었고, 1974년 말 시세는 분양가의 두 배 수준으로 뛰었다. 아파트는 중산층의 꿈이 됐고, 강남 아파트 개발로 이어졌다.

아파트를 통한 재테크의 상징이 된 시범아파트의 재건축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17년 안전진단을 통과했지만 이듬해 도시계획 심의에 막혔다. 층수와 개발 밀도, 공공기여를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고, 2021년 신속통합기획에 참여하면서 돌파구를 찾았다.

마침내 영등포구가 어제 시범아파트 재건축사업 시행계획을 인가했다. 삼성물산이 시공을 맡아 공사비 2조2685억원을 들여 한강을 내려다보는 최고 59층의 초고층 단지로 탈바꿈시킬 예정이다.

반세기 전 한국의 주거 혁신을 이끈 ‘시범’은 한국 아파트 역사의 선구자다. 87개월의 사업 기간을 거쳐 들어설 새 단지는 무엇의 시범이 될까. 아파트라는 낯선 주거 방식을 도시의 표준으로 바꾼 시범이 이제는 재건축이 어떻게 도시의 가치를 높일지 보여줄 차례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