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상플랫폼·지하 배관 이미 갖춰
탄소포집·저장 시설로 활용 가능
철거 땐 수천억 들여 다시 지어야
"정부 주도 초기 인프라 조성 절실"
정부가 탄소 저장소로 활용할 수 있는 동해 폐가스전의 주요 시설을 전면 철거하기로 했다. 한국을 최초로 산유국 반열에 올려놓은 동해 가스전은 2021년 생산을 종료했다. 정부는 이후 탄소 포집·저장(CCS) 인프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해상 플랫폼과 지하 배관(주입정) 등 기존 시설을 재활용하면 CCS 인프라를 새로 구축하는 것보다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가 이 시설을 철거하기로 하면서 국내에 대규모 CCS 인프라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 민간 기업은 사업 추진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뒷전으로 밀려난 탄소 인프라
12일 정부 안팎에 따르면 산업통상부는 최근 한국석유공사에 2021년 가스 생산을 종료한 동해 폐가스전의 해상 플랫폼을 원상회복(철거)하라는 명령을 담은 공문을 보냈다. 국회는 지난달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을 개정해 CCS, 해상풍력 등 탄소중립산업으로 시설을 재활용하면 원상회복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신설했다. 탄소 감축을 위해 기존 인프라를 최대한 살려 쓰자는 취지에서다.
그럼에도 철거를 밀어붙이는 것에 대해 산업부는 “법 개정이 이뤄지기 전인 7월에 조광권이 만료됐기 때문에 원상회복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석유공사와 한국가스공사 간 통폐합이 논의되는 상황에서 석유공사가 대규모 재정이 들어가는 신규 사업을 벌이는 데 회의적인 것도 이유로 꼽힌다.
CCS는 철강, 석유화학을 비롯한 산업 시설과 발전소 등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공기 중으로 나가기 전에 포집해 파이프라인이나 선박으로 수송한 뒤 지하 깊은 층에 격리·저장하는 기술이다. 미국, 유럽 등 주요국은 초기 경제성이 부족한 CCS 인프라에 천문학적인 보조금을 투입해 폐유전과 가스전을 국가 탄소 저장 거점으로 전환하고 있다.
동해 폐가스전이 국내 CCS의 거점이 되면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등의 해외 폐가스전으로 탄소를 싣고 가 저장하는 국경 통과 방식보다 수송 비용을 대폭 절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국내 인프라를 활용한 기술 실증을 통해 관련 산업 생태계를 육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적 가치가 크다는 평가를 받았다.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주관하는 대규모 탄소 액화·벙커링 허브 실증 국책과제에 현대건설, GS칼텍스 등 민간 기업이 대거 참여해 포집·액화부터 운송, 저장에 이르는 전 주기 엔지니어링 기술 고도화에 나서기도 했다.
◇정부 주도 초기 개발 절실
문제는 경제성이다. 당초 동해 폐가스전 사업은 연간 120만t의 탄소를 매립하는 대규모 인프라로 기획됐다. 그러나 탄소를 포집해 바닷속에 묻는 데 드는 비용에 비해 탄소배출권 가격이 턱없이 낮아 예비타당성조사 심사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기후부는 내년도 예산에 400억원을 반영해 폐가스전을 소규모 기술 검증 테스트베드로 활용하는 방안을 우선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스전 관리 부처인 산업부가 원상회복에 나서면서 소규모 기술 검증마저 첫 삽을 뜨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기존 해상 플랫폼과 주입 설비 등을 완전히 철거하면 민간 기업은 바다 위에 전용 시설을 새로 짓거나 특수 리그선을 띄워야 해 사업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국가적으로는 수천억원을 들여 지은 인프라를 또다시 수천억원을 들여 부수고, 훗날 민간이 다시 거액을 들여 짓게 하는 정책 비효율이 빚어지는 것이다.
철강과 석유화학 등 산업계는 2035년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를 달성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초기 CCS 인프라 조성이 절실하다고 호소한다. 정부가 설정한 2035년 NDC 상한선(2018년 대비 61% 감축)을 맞추려면 총 감축 목표량 4억5280만t 가운데 2030만t(4.5%)을 탄소 포집·활용·저장(CCUS)으로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개정안을 대표발의한 박성민 국민의힘 의원은 “폐가스전 시설을 미래 에너지 산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한 만큼 산업부도 입법 취지에 맞게 기존 시설의 재활용 방안부터 검토할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