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소환원제철 등 국가전략기술의 탈탄소 전환을 위해 산업계가 요구해 온 원전 전력직접구매(PPA) 제도 도입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발전 단가가 가장 낮은 원전으로 생산한 전기를 특정 산업에 독점 공급하면 일반 전기요금이 오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산업계는 지난 7일 이재명 대통령이 10년간 녹색대전환에 1000조원을 투입하는 ‘한국형 녹색대전환(K-GX) 전략’을 내놓고도 생산공정의 탈탄소화에 필수적인 산업용 전기요금에 대한 뚜렷한 대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고 우려했다. 전문가들은 기업의 리스크 분담을 전제로 하는 제3의 원전 전기 공급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입장 엇갈리는 정부와 기업

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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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박수민 국민의힘 의원이 기후에너지환경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기후부는 원전 PPA 등 전용 전력 조달과 관련해 “특정 사용자가 저원가 발전기를 독점하면 다른 소비자에게 요금 부담을 전가하고 형평성 문제를 유발한다”며 사실상 반대 입장을 밝혔다. 기후부가 지난달 초 내부 토론에서 원전 PPA 도입은 잠정적으로 불가하다는 방침을 정했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전 PPA란 기업이 전력거래소를 거치지 않고, 원전과 따로 계약을 맺어 전기를 직접 사들이는 제도다. 철강업계는 탄소 배출량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수소환원제철을 상용화하기 위해서는 원전 PPA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h당 180원을 웃도는 산업용 전기요금에 녹색대전환을 위해 의무적으로 구입해야 하는 신재생에너지공급인증서(REC) 비용까지 추가하면 실질 전력비가 ㎾h당 200원대 중후반으로 치솟아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철강업계 관계자는 “현 체계에서는 수소환원제철에 필수적인 수소 생산단가가 ㎾h당 1만3500원을 넘어가기 때문에 경제성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등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첨단 산업계에서도 무탄소·저원가 전력 확보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반면 기후부는 철강업 등 특정 산업에 원전 PPA를 허용하면 일반 전기요금이 오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철강업계는 일례로 올해 설계수명이 다하는 월성 2호기의 수명을 연장해 수소제철 전용으로 전환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지만 월성 2호기를 원전 PPA로 돌리고 원전보다 발전단가가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으로 빈자리를 메우면 한전의 연간 전력 구입비가 약 3800억원 불어난다. 이 경우 ㎾h당 0.69원의 전기요금 인상 요인이 발생해 월평균 335㎾h를 쓰는 도시 지역 4인 가구의 연간 전기요금이 2780원 늘어날 것으로 추산된다.

◇프랑스·핀란드 모델 검토해야

기후부와 산업계의 주장이 팽팽히 엇갈리자 전문가들은 기업이 원전 운영비용을 분담하는 대신 일정 수준의 원전 PPA를 허용하는 해외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프랑스는 전력 다소비 기업이 국영전력공사(EDF)에 대규모 선급 투자금을 내고 핵연료비와 유지보수비 같은 가동 원가 변동 위험을 분담하는 대신 전기를 원가 수준으로 장기간 할당받는 제도를 운영한다.

핀란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업이 원전 건설 특수목적법인(SPC)의 주주로 직접 출자하고, 생산한 전력을 보유 지분만큼 원가로 우선 인수하는 방식으로 올킬루오토 3호기 원전을 건설했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단순 특혜성 요구는 차단하되, 민간이 자본과 리스크를 분담하는 방식에는 전기사업법상 전력 인수 특례를 여는 등 제도적 출구를 마련해줘야 신규 원전 투자와 산업의 탈탄소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