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녹색 철강의 마지막 퍼즐, 원전수소
인공지능 전환과 녹색 전환이라는 두 거대한 흐름이 인류 삶을 통째로 바꾸고 있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체하고, 청정에너지가 화석연료를 밀어내면서 생산과 소비의 방식도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새로운 문명사적 전환기에 들어선 모습이다.

그러나 수차례의 문명사적 혁명에도 3000년 가까이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문명의 물리적 기초가 여전히 철(鐵)이라는 사실이다. 농업혁명을 이끈 농기구에서 산업혁명의 증기기관, 철도와 자동차, 오늘날의 풍력발전기와 데이터센터에 이르기까지 철은 빠지지 않는다. 철강이 세계 금속 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철기시대를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철이 현대 문명의 물리적 기초라면, 산업혁명 이후 인류의 번영을 만들어낸 제도적 기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다. 오늘날의 물질적 풍요는 철과 에너지가 시장경제라는 제도적 토양 위에서 결합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냉정한 작동 원리는 가격과 비용 경쟁이다. 아무리 좋은 가치를 담은 제품이라도 가격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면 시장에서 외면받는다. 환경을 생각해 유기농 제품을 집어 들었다가 두세 배 높은 가격표를 보고 다시 내려놓는 것이 현실 세계의 소비 행태다. 녹색 전환도 다르지 않다. 환경보호라는 명분과 경제적 실리가 명실상부(名實相符)해야 지속 가능하다.

그런데 현대 문명의 물질적 기초인 철이 녹색 전환의 가장 어려운 시험대에 올라 있다. 철강은 이산화탄소 배출이 가장 많은 산업이기 때문이다. 철을 포기할 수 없다면 이산화탄소 없는 무탄소 철강을 생산해야 한다. 현재 가장 유력한 해법이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하는 수소환원제철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수소환원제철의 생산비가 기존 고로 방식보다 지역에 따라 50~140% 높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결국 무탄소 철강의 성패는 얼마나 싸고 안정적으로 청정수소를 공급하느냐에 달려 있다.

먼저 재생에너지로 만드는 그린수소를 선택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기후와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출렁이고 간헐성 극복 비용이 큰 재생에너지 발전만으로는 안정적인 수소를 저렴하게 공급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24시간 일정하게 청정 전력과 고온의 열을 공급할 수 있는 원자력 발전은 저렴하게 대량의 수소를 생산할 수 있는 최적의 에너지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온 열을 수전해에 활용할 수 있는 고온 원자로는 수소 생산에 적격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고온원자로와 고온수전해를 결합하면 열에서 수소로의 전환효율이 45~55% 수준에 이를 수 있다고 분석한다.

이는 실험실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국은 뉴욕주 나인마일포인트 원전에 수전해 설비를 설치해 2023년부터 원전 수소를 생산하고 있다. 기존 원전도 전기만 파는 발전소에서 전기와 수소를 함께 생산하는 청정에너지 허브로 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증 사례다.

탄소중립은 선언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합리적 비용이 전제돼야 한다. 특히 제조업과 철강 비중이 높은 우리나라에는 더 절실한 문제다. 청정수소의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다.

철기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다만 철 제조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무탄소 전력으로 값싼 청정수소를 만들고, 그 수소로 경쟁력 있는 무탄소 철을 생산해야 한다. 녹색 전환이 새로운 산업혁명이 되려면 원전수소라는 현실적인 선택지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