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네기홀 데뷔 후 1720년산 첼로 '몬타냐나' 만나
촉망받던 청년시절, 소련 감옥 수감돼 강제 노동
2년전 전신마비 이겨내기도…난 운이 좋은 음악가
유일한 제자 장한나와 함께 슈베르트 녹음하고파
전신마비로 생사의 고비에 섰던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78)가 다시 활을 들었다. 지난 내한공연 당시 한국경제 아르떼와 만난 그는 ‘생존과 부활의 거장’ 그 자체였다. 반세기 넘도록 최정상을 지켜온 거장은 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 60주년이다. 그가 시련을 딛고 다시 무대에 선 이유는 명확했다. 여전히 눈부신 청춘의 열정으로 세상에 위로를 전하기 위해서다.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가 새겨진 자신의 첼로 케이스를 바라보고 있다. /ⓒ구본숙
11월이 되면 마이스키의 시곗바늘은 미국 뉴욕의 가을밤으로 되돌아간다. 1973년 11월 27일, 카네기홀 데뷔 공연을 막 마친 스물다섯 살의 청년 마이스키를 만나러 한 신사가 백스테이지로 찾아왔다. “아흔이 넘은 제 삼촌이 젊은 연주자에게 첼로를 물려주고 싶어 하세요. 오늘 연주를 정말 잘 들었어요. 악기의 주인은 바로 당신 같네요.” 당시 첼로를 빌려 쓰던 그에게 찾아온 뜻밖의 제안이었다. 이틀 뒤인 11월 29일, 그는 1720년산 몬타냐나 첼로를 품에 안았다. 1720년은 첼로를 독주 악기로 처음 빛나게 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해다. “매년 11월 29일이면 첼로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진 그날을 기념해요. 첫눈에, 첫 감촉에, 첫 울림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죠. 올해 11월이면 함께한 지 53주년이 되네요.” 300년의 세월을 담은 몬타냐나의 깊고 풍부한 울림은 마이스키 특유의 낭만적 표현력과 만나 대체 불가능한 그만의 음색을 완성했다.
절망을 딛고 무대로 돌아오기까지
운명 같은 악기와 함께 세계를 누비던 그에게 2년 전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갑작스레 닥친 전신마비로 연주는커녕 거동조차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응급수술을 받고 5개월간 병원에 입원했는데 정말 힘든 시기였어요. 혈액 감염 수치가 기준치보다 75배 넘게 치솟아 중환자실에도 누워 있었죠. 의사들은 제가 다시 걷기 힘들 것이라고 했어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그를 일으킨 건 가족과 음악, 그리고 동료들의 굳건한 믿음이었다. 평생의 음악적 동반자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85)의 격려는 그에게 다시 무대로 향할 용기를 줬다. 신경이 100% 돌아오지 않아 지금도 왼팔을 들어 올리는 게 버겁지만, 그는 지난해 1월 스위스에서 아르헤리치, 바이올리니스트 자닌 얀선과 함께 성공적으로 복귀 무대를 치렀다.
퇴원 후 가장 먼저 연주한 곡은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 ‘프렐류드’였다. 마이스키가 인터뷰 내내 애착 인형처럼 다리 위에 얹고 있던 첼로 케이스에 새겨진 선율 중 하나다.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에요. 아이들과 음악이 없었다면 전 아마 다시 일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활 대신 삽을 쥐었던 청년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거장에게도 청춘의 아픈 기억이 있다. 1966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입상과 로스트로포비치 사사로 찬란한 청춘을 열었지만, 스물두 살 무렵 친누나를 따라 이스라엘로 망명하려 한다는 이유로 소련 당국에 의해 억울하게 수감됐다. 감옥과 강제 노동 수용소, 정신병원을 전전하며 활 대신 삽을 쥐고 시멘트를 퍼 날라야 했던 2년의 세월이었다. “첼로 근처에 가지도 못했어요. 20년 치 인생 경험을 그 짧은 시간에 다 해버린 것 같아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런 시련을 준 제 운명과 당시 소련 당국에 고마움마저 느껴요. 그 시절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한 인간이자 음악가로서 한층 깊어진 계기가 됐으니까요.”모진 세월을 견딘 그의 비결은 ‘유머’에 있다. “과거 소련 시절 속마음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농담으로 삶을 이어갔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거장의 마지막 꿈, 늘 청춘으로
마이스키는 스스로 “세상에서 제일 운이 좋은 첼리스트”라고 확신한다. 소련에서 활동하던 로스트로포비치와 미국으로 망명한 퍄티고르스키 모두를 스승으로 둔 유일한 첼리스트여서다. 자식 복도 많다. 그에겐 ‘마이스키 트리오’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 딸 릴리(39)와 바이올리니스트 아들 사샤(37), 그리고 사랑스러운 막내딸까지 여섯 명의 아이가 있다. 지금까지 발매한 50여 장의 음반 중 첫째 딸 릴리의 탄생을 기념한 <메디테이션>을 비롯해 자녀들을 위해 만든 앨범을 가장 소중히 여긴다는 그는 “바흐에게 무반주 첼로 모음곡 여섯 곡이 있다면, 내겐 여섯 아이가 있는 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유일한 제자인 첼리스트 장한나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1992년, 마이스키는 장한나의 부친이 보내온 영상에서 남다른 깊이로 연주하는 아홉 살 소녀를 발견했다. “한나는 어린 나이에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아는 아이였어요. 한나를 통해 환생을 믿기 시작했죠.” 그는 최근 예술의전당 사장으로 취임한 제자에게 진심 어린 응원을 보내면서도 “언젠가 슈베르트의 현악오중주를 함께 녹음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내비쳤다.
마이스키는 클래식계의 고리타분한 관습에 맞서는 남다른 철학도 드러냈다. 딱딱한 연주복 대신 몸을 구속하지 않는 이세이 미야케의 셔츠를 즐겨 입는 것도 결국 ‘음악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다. “우리가 위대한 음악을 연주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음악을 땅으로 끌어내리게 됩니다. 하지만 연주의 본질은 청중이 음악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예요. 연주자는 작곡가와 청중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이자 봉사자일 뿐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청춘의 열정을 품고 사는 그에게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지 물었다. “오래 살되, 늘 청춘을 유지하는 것(Live long but die young)”이라며 웃어 보인 그는 노년에 기량이 떨어져 고집을 부리게 된다면 주변 사람에게 “내 팔을 부러뜨려서라도 무대에서 멈추게 해달라고 부탁해뒀다”고 유쾌한 농담을 건넸다. 시련을 낭만적인 선율로 바꿔 놓은 마이스키는 오늘도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의 활을 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