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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 저녁 전북 완주군의 천년고찰 송광사 앞마당. 사찰음식과 서양 오케스트라, 가톨릭 신부의 오르간 연주가 한데 뒤섞였다. 최근 불교계에 부는 ‘힙불교’ 열풍과는 결이 다른 무대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15년째 묵묵히 이어온 음악회로 종교 간 경계 없이 화합을 이룬 자리다. ‘나누고, 비우고, 채운다’는 뜻의 ‘송광백련 나비채 음악회’는 완주를 대표하는 문화 행사가 됐다.

나누고…“음악이 지닌 위로의 힘을 믿습니다”

나비채 음악회는 송광사 주지 백강법진 스님(68)의 주도로 시작됐다. 법진 스님은 한국경제 아르떼와 만나 “송광사에 신부님이 와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건 그렇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며 “오늘 만찬 시작 기도는 개신교 목사님이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19일 완주 송광사에서 열린 나비채음악회 객석이 관객들로 가득 차 있다. /ⓒjiseok jo
지난달 19일 완주 송광사에서 열린 나비채음악회 객석이 관객들로 가득 차 있다. /ⓒjiseok jo
음악회의 출발은 2011년, 이름은 ‘사랑음악회’였다. 법진 스님은 오랜 미국 생활 중 이혼과 가정 해체가 사회 문제로 번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귀국 후 한국에서도 같은 현상이 빠르게 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가 택한 처방은 음악이었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칠월칠석을 ‘사랑의 날’로 정하고, 이혼 소송 중인 전국의 불자(佛者) 부부를 초대했다. 법진 스님은 “좋은 음악을 들으면 맺혔던 마음이 풀리고, 서운했던 마음도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으로 바뀔 것으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당시 참석한 부부 상당수가 결혼 생활을 이어갔고, 이는 음악회를 15년간 지속한 원동력이 됐다. 법진 스님은 몇 년 뒤 음악회 이름을 ‘나비채’로 바꿨다. 그는 사랑을 넘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했고, 답은 ‘나누고, 비우고, 채우고’였다.

법진 스님이 생각한 첫 번째 나눔은 음악이다. “꼭 예술의전당에 가야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여기에도 야외무대를 마련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사실 그는 본래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출가한 그가 음악에 눈을 뜬 건 뜻밖에도 미국에서였다. 한국인 방문객을 안내하며 링컨센터와 줄리아드를 드나들었고, 유학생 졸업 연주에도 초대받으며 자연스럽게 음악에 스며들었다. 처음엔 낯설던 클래식도 음반을 사서 반복해 듣고, 같은 곡을 다른 연주자 음반으로 비교해 들으며 귀를 틔웠다. “음악의 음자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 음악이 사람의 정서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힘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비우고…“내 것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닙니다”

나눔 다음은 비움이다. 법진 스님이 말하는 비움은 단순한 무소유가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완전히 자기 몫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에 가깝다. 그는 “내가 보유한 능력이나 재산은 관계 속에서 얻어진 것”이라며 “잠시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철학은 송광사에서 나누는 밥 한 끼로 구현된다. 불전에 누군가는 천원을, 누군가는 만원을 놓고 간다. 법진 스님 자신도 누가 얼마를 시주했는지 알지 못한다. 받은 이를 특정할 수 없다면 돌려줄 때도 상대를 가릴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누가 와서 시주했는지 모르잖아요. 그러면 그 가운데 일부는 또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제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요.”

음악회 날이면 신도들이 모여 음식을 준비하고, 농장에서 직접 딴 채소가 상에 오른다. 누가 먹을지 모르지만 한 끼도 허투루 짓지 않는다. 내 그릇에서 비운 만큼 누군가의 그릇을 채우는 것, 그것이 송광사식 회향(回向·공덕을 돌려 나누는 일)이다.

채우고…산사에 울려 퍼진 생상스의 오르간

나비채음악회를 지휘하는 홍석원.
나비채음악회를 지휘하는 홍석원.
9월 19일 공연의 프로그램명은 ‘빛의 여정’이었다. 한경아르떼필하모닉 브라스 주자들이 뒤카의 발레 ‘라 페리를 위한 팡파르’로 문을 열었고, 이어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중 ‘바카날레’가 울려 퍼졌다. 지휘를 맡은 홍석원은 “신성한 사찰에서 이교도의 춤을 다룬 곡을 연주해 죄송하다”고 너스레를 떨어 객석에서 웃음과 박수를 끌어냈다.

이날 프로그램은 대부분 생상스로 채워졌다. 이진상이 협연한 피아노협주곡 2번을 시작으로 ‘죽음의 무도’와 ‘동물의 사육제’ 중 ‘백조’를 거쳐 교향곡 3번 ‘오르간’으로 마무리됐다.

한경아르떼필 브라스팀. /ⓒjiseok jo
한경아르떼필 브라스팀. /ⓒjiseok jo
생상스 피아노협주곡 2번은 첫 악장부터 고난도 패시지가 이어지는 곡이다. 이진상은 기교를 과시하기보다 여유롭게 풀어내며 빠른 음형에서도 타건의 중심을 지켰다. 흥미로운 대목은 리허설과 본 공연의 온도차였다. 사전 리허설에서 비교적 빠르게 밀어붙인 연주는 본 공연에서 달라졌다.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흔들리자 산사 특유의 느린 시간이 객석에 내려앉았다. 이진상과 한경아르떼필은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몰아치는 부분에서도 호흡을 더 주며 현장과 발을 맞췄다.

마지막은 최호영 신부의 ‘오르간’이었다. 전류가 들어가는 순간 무대의 색채가 바뀌었다. 낮고 묵직한 울림이 오케스트라 깊은 곳에서 솟아 무대를 넘어 객석으로, 그 뒤의 불상으로, 다시 산의 어둠 속으로 퍼져나갔다. 서양 종교의 악기가 불교 사찰과 충돌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소리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소리를 가두기 위해 바깥을 차단하는 콘서트홀과 달리 송광사 앞마당에는 바람도 나무도 밤공기도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스님이 음악회를 여는 이유

법진 스님은 올해로 절 생활 51년, 수계 47년, 송광사에 몸담은 지는 15년째다. 그에게 음악회는 특별한 연례행사가 아니다. 송광사는 나비채 음악회 외에 봉축음악회와 송년음악회를 열고, 겨울이면 실내에서 피아노사중주 같은 작은 음악회도 개최한다. 유명 연주자가 예고 없이 절을 찾으면 그 자리에서 ‘번개 음악회’를 열기도 한다. “유명 피아니스트가 절에 왔다고 해봐요. ‘여기 오셨으니까 번개 음악회 한 번 하고 가시오’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거절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법진 스님은 작은 음악회만의 매력을 강조했다. 연주자와 관객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음악을 나누는 경험은 특별하다. “바로 코앞에서 좋은 연주자를 보잖아요. 관객에게는 전설 같은 예술가죠.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음악회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공연이 끝난 뒤에도 법진 스님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떠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버스에 올라 한 명 한 명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힙불교’라는 말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송광사는 그렇게 나누고, 비우고, 채운다는 세 단어를 밥과 음악으로 실천했다.

전북 완주=조동균 기자 chodog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