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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하나의 계약이 계약 당사자 두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정부와 기업이 계약을 체결하면 시민이 그 혜택을 받고, 건설회사가 발주자와 계약을 체결하면 건물의 소유자나 이용자가 그 결과를 누린다. 금융회사와 자산운용사가 체결한 계약도 투자자나 제3자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계약의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 계약의 혜택을 받는 사람이 손해를 입었다면, 그 사람도 계약을 근거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을까? H. R. Moch Co. v. Rensselaer Water Co. 사건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불이 났다. 소화전을 열었지만 물은 시원하게 나오지 않았다. 불길은 옆 건물로 옮겨붙었고, 결국 H. R. Moch Company("Moch")의 창고와 그 안에 쌓아 둔 물품이 모두 탔다. 화재 사실을 통보받고도 소화전에 충분한 물과 수압을 공급하지 않은 수도회사(Rensselaer Water Company)에 책임이 있다고 Moch는 다투었다. Moch는 그 수도회사와 계약을 맺은 일이 없었다. 수도회사의 계약 상대방은 Rensselaer 시였고, 시는 정해진 요금을 내고 소화전에 물을 공급받기로 약정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Moch는 세 갈래의 주장을 했다. 첫째, 시와 수도회사 사이의 급수계약에서 시민인 자신은 제3자 수익자(third-party beneficiary)다. 둘째, 계약과 별개로 수도회사의 행위는 불법행위(tort)에 해당한다. 셋째, 수도회사에는 법률상 급수의무가 있으므로 그 위반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8년 뉴욕주 최고법원(Court of Appeals)은 세 주장을 모두 물리쳤다(H. R. Moch Co. v. Rensselaer Water Co., 247 N.Y. 160, 159 N.E. 896 (1928)). 이 사건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하다. 수도회사에 소화전 급수의무가 있었다는 점 자체는 다툼이 없었다. 의무는 분명히 있었는데, 불탄 창고에 대한 책임은 없었다. 바로 그 틈에 계약법의 중요한 경계가 있다.
의무가 있다는 것과 그 의무를 주장할 수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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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ch의 첫 번째 주장은 꽤 자연스러웠다. 소화전에 물을 대기로 한 계약의 목적은 결국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화재로부터 지키는 데 있을 터이니, 그 보호를 받는 시민도 계약의 수익자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계약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과 계약에 의해 직접 권리를 취득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보았다. 법원의 질문은 "그 책임은 어디에서 멈추는가"였다.
Moch의 청구를 인정하면, 한 번의 화재로 여러 건물이 탔을 때 피해자마다 수도회사에 계약책임을 물을 수 있게 된다. 불이 크게 번질수록 청구권자와 손해액도 함께 불어난다. 결국 시와 맺은 계약 하나가 수도회사에 도시의 모든 주민에 대한 화재보험자의 지위를 떠안기는 셈이 된다. 시가 지급하는 급수 요금에는 그런 위험을 인수하는 대가가 들어 있지 않았고, 계약 어디에도 그런 의무를 지겠다는 뜻은 드러나 있지 않았다.
계약상 의무를 계약 주변에 선 모든 사람에 대한 의무로 넓히면 책임의 합리적 한계(reasonable limits)가 사라진다는 것이 법원의 판단이었다. 불법행위 주장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계약 당사자가 아닌 모든 사람에 대한 불법 행위상 의무가 생기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에서 문제 된 것은 수도회사가 새로운 위험을 만들어낸 적극적 가해(misfeasance)가 아니라, 약속한 편익을 주지 않은 부작위(nonfeasance)였다.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혜택을 주지 못한 것에 가깝다는 것이다. 법률상 의무 위반이라는 주장 역시 같은 이유로 인정되지 않았다. 급수의무를 정한 법률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의무의 간접적 결과로 손해를 본 모든 주민에게 손해배상청구권까지 준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의도된 수익자와 부수적 수익자
여기서 영미계약법의 중요한 원리 하나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본래 영미법의 출발점은 계약 관계의 상대성(privity of contract)이다. 계약은 당사자를 구속할 뿐, 제3자는 그 계약으로 권리도 의무도 얻지 못한다는 원칙이다. 미국은 Lawrence v. Fox, 20N.Y. 268 (1859) 판결 이래 일정한 범위에서 제3자의 직접 청구를 인정해 왔는데, 계약 당사자들이 애초부터 직접 이익을 주려 한 사람은 "의도된 수익자(intended beneficiary)"로서 직접 청구권을 갖는다.
반면, 계약의 결과로 우연히, 간접적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은 "부수적 수익자(incidental beneficiary)"에 그쳐 아무런 청구권이 없다. 법원이 묻는 것은 "누가 이익을 얻었는가"가 아니라 "당사자들이 그 사람에게 직접 권리까지 주려 했는가"이다.
나아가, 미국의 계약법 리스테이트먼트(Restatement Second of Contracts)에서는, Moch의 결론을 정부 계약에 관한 규칙으로 명문화하여, 공공기관과 계약한 사업자는, 계약에 그런 취지가 드러나지 않는 한, 이행이 부실해 손해를 본 개별 시민에게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우리 민법에서도 제3자를 위한 계약을 인정해 제3자가 채무자에게 직접 이행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되, 제3자가 채무자에게 계약의 이익을 받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때에 그 권리가 생긴다고 하여(민법 제539조), 유사한 법리를 규정하고 있으나, 별도의 수익 의사표시를 요구하지 않는 영미법과 차이가 있다.
우리 법도 사실상의 이익을 얻었다는 것만으로 제3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아, 결론에서는 Moch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회사가 보험회사와 단체보험계약을 맺으면서 특정 임직원이나 그 유족에게 보험금청구권을 직접 준 경우라면 그들은 계약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반면, 기업과 외주업체 사이의 업무위탁계약 덕분에 사실상 편익을 누린 제3자가, 그 계약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곧장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불탄 창고는 어떻게 보호받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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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사건에서 "창고주인인 Moch는 끝내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화재로 인한 재산손해는 보험료를 받고 그 위험을 인수한 화재보험자가 메우는 것이 이 판결이 전제한 그림이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피해자를 내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대가를 받고 어떤 위험을 떠안았는지에 따라 책임의 자리를 정리한 것이다.
계약책임이라면 당사자이거나 직접 권리를 부여받은 제3자 수익자인지, 불법행위책임이라면 계약과 별도의 주의의무가 있는지, 법률상 책임이라면 그 법률이 누구를 보호하려 한 것인지를 따로 물어야 한다. 이 구별은 오늘날 더 요긴해졌다. 건설계약 하나에도 발주자·시공사·하도급자·건물주·임차인이 얽히고, 금융·자산운용계약에는 판매회사·수탁회사·수익자가 등장하며, 플랫폼과 입점 판매자의 계약은 소비자에게 곧바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계약의 영향이 넓다는 사실이 계약책임의 범위까지 넓혀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해관계인이 많을수록 계약서에는 더 또렷한 선이 필요하다. 이에, 영문계약에서 제3자에게 권리를 주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는 제3자 권리 배제 조항(no third-party beneficiaries clause)을 두거나, 거꾸로 수익자를 특정하고 그가 행사할 권리의 범위와 한계를 명시해 두는 것은 중요하다.
결국 Moch 사건이 실무에 던지는 질문은 간단하다. "이 계약으로 누가 이익을 얻는가?"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질문, "그 이익을 법적으로 직접 주장할 권리까지 그에게 주었는가?"이다. 계약의 혜택과 계약상 권리는 다르다. 계약의 영향은 넓게 퍼지지만 계약책임에는 경계가 있다. 1928년 불탄 창고를 둘러싼 오래된 다툼은 지금도 같은 말을 한다. 계약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뿐 아니라, 누구에게 권리를 주기 위한 것인지까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고려대학교 법과대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조지타운대 로센터에서 계약법을 포함한 기업 법무 분야를 연구했다. 한국과 미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법무법인 태평양과 김신유(현, 화우)에 근무할 당시 기업 자문에 집중했다. 메트라이프, 재보험사 스코르 등 글로벌 기업에서 법무·준법·리스크 총괄 책임자로 일하며 다양한 국가와 산업을 아울러 계약·규제 이슈를 해결해 온 실무 중심 전문가다. 현재 법무법인 공유에서 국내외 계약과 기업 법무를 중심으로 자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상사중재원(KCAB) 국내·국제 중재인, 싱가포르 국제조정센터(SIMC) 조정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영미계약법과 국제거래 계약 실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영미계약법 원리』, 『국제거래 계약의 이해와 기술』 등을 집필했다. 기업·공공기관 강의와 칼럼 기고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