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균의 오페라 사회학]
오늘의 눈으로 읽는
100년 전 오페라 이야기
(4) 자코모 푸치니 '라 보엠'
서울시는 청년들의 주거비 부담을 낮추겠다며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올해만하더라도 1만5000명에게 월 최대 20만원의 월세를 지원하기로 했고, 부동산 중개보수와 이사비도 최대 40만원까지 준다. 2030년까지 청년주택 7만4000가구를 공급하는 계획까지 내놨다.
정책 지원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청년 주거 문제가 커졌다는 뜻이다. 집세 부담에 허덕이다보면 궁핍한 생활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마련이다.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 / 퍼블릭 도메인. 미국 의회도서관·Wikimedia Commons
청년 빈곤과 주거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오페라가 있다. 189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초연된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라 보엠’이다. 라 보엠은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예술과 사랑을 좇는 보헤미안의 인생을 의미한다.
오페라의 배경은 시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 음악가 쇼나르, 철학자 콜리네가 사는 곳은 파리의 낡은 다락방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데 방에는 불을 땔 장작조차 없다. 로돌포와 마르첼로는 추위를 견디다 못해 로돌포가 쓴 희곡 원고를 난로에 넣어 태운다. ‘라 보엠’의 낭만은 바로 이 추운 다락방에서 시작된다.
같은 건물에 사는 재봉사 ‘미미’가 꺼진 촛불을 들고 로돌포의 방문을 두드린다. 어둠 속에서 잃어버린 열쇠를 찾던 두 사람의 손이 맞닿는다. 그 순간, 로돌포의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이 시작된다.
오페라 역사상 가장 낭만적인 첫 만남의 장면이다. 하지만 음악은 제목에서부터 오페라의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제목 그대로 병에 걸린 미미의 손은 차갑기만 하다. 난방이 되지 않는 다락방의 추위와 미미의 차가운 손,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지는 미미의 병세 속에서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만이 잠시 뜨겁게 달아오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라 보엠' 무대. 다락방에서 가난한 시인 로돌포가 미미를 향해 자신을 소개하고 있다. / 사진 제공. Met Opera ⓒ EVAN ZIMMERMAN
아돌프 호엔슈타인이 그린 1896년 푸치니 오페라 ‘라 보엠’ 초연 포스터(1895년 작) / 퍼블릭 도메인 프랑스국립도서관·Wikimedia Commons”
이어 미미가 ‘내 이름은 미미’를 부른다. 미미는 로돌포와 만난지 채 10분이 되지도 않아 본명이 루치아라며 신상까지 공개한다. 두 사람은 금새 사랑에 빠져 ‘오 사랑스러운 아가씨’를 함께 노래한다. 푸치니의 음악은 춥고 가난한 다락방을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공간으로 바꿔놓는다. 하지만 낭만은 오래가지 못한다.
오페라 3막에서 눈이 내리는 파리 외곽에서 마르첼로를 만난 로돌포는 미미와 헤어지려는 진짜 이유를 털어놓는다. 처음에는 질투 때문인 것처럼 말하지만, 결국 미미가 중병(결핵)에 걸렸고 자신의 춥고 가난한 방에서는 병이 더 깊어질 것이라고 고백한다. 사랑이 식어서 떠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만으로는 따뜻한 방도, 충분한 음식도, 치료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숨어서 이 대화를 엿들은 미미는 로돌포에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장 헤어지지 못한다. 추운 겨울이 지나 꽃이 피는 봄까지만 함께 있기로 한다. 가난은 이들이 아픈 연인을 돌보고,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함께 살 수 있는지를 자신의 의지로 결정할 수 없게 만드는 장벽이다.
1896년 토리노 ‘라 보엠’ 세계 초연을 위해 아돌프 호엔슈타인이 그린 미미의 의상 스케치. 1막의 장면에 맞춰 손에 촛대를 들고 있다. / 퍼블릭 도메인. (리코르디 아카이브) Archivio Storico Ricordi·Wikimedia Commons.
4막에서 미미는 처음 로돌포를 만났던 다락방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병은 이미 깊어졌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하나씩 내놓는다. 무제타는 귀고리를 팔아 약을 마련하려 하고, 철학자 콜리네는 낡은 외투를 팔러 나간다. 콜리네가 부르는 ‘낡은 외투여, 잘 가거라’는 짧지만 ‘라 보엠’의 네 주인공의 가난을 압축해 보여주는 아리아다. 미미를 살리기 위해 내놓을 수 있는 재산이 오래 입은 외투 한 벌뿐인 것이다.
푸치니는 마지막 장면에서 1막의 행복했던 기억도 다시 불러온다. 로돌포와 미미가 처음 만났을 때 들렸던 선율들이 되돌아온다. 사랑의 시작을 알렸던 음악이 이제는 사라져가는 사랑을 기억하는 음악으로 바뀐다. 결국 미미는 다락방에서 숨을 거둔다.
우리는 오랫동안 ‘라 보엠’을 가난하지만 꿈과 사랑이 있었던 청춘의 낭만으로 기억해왔다. 하지만 가난한 청춘이 아름다운 것과 가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은 다른 이야기다. 라 보엠은 빈곤의 비극을 아름다운 음악으로 포장한 오페라다.
1896년 ‘라 보엠’ 초연 당시 2막 무대를 제작하기 위해 제작된 파리 라탱 지구 무대 스케치 / 퍼블릭 도메인. 리코르디 아카이브 (Archivio Storico Ricordi)
2024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서울시오페라단 '라보엠' 공연 사진 / ⓒ세종문화회관 제공
올해 11월에는 두 개의 ‘라 보엠’이 관객을 만난다. 서울시오페라단은 5일~8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작품을 공연한다. 2024년 처음 선보인 엄숙정 연출의 프로덕션이 2년 만에 돌아온다. 미미 역에는 당시 무대를 이끈 소프라노 황수미와 이번에 처음 미미에 도전하는 박혜상이 나선다. 14일에는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는 성남문화재단의 콘서트오페라 ‘라 보엠’이 찾아온다. 최근 뉴욕 메트오페라 ‘라 보엠’에서 쇼나르 역으로 열연한 바리톤 김기훈이 마르첼로 역을 맡았다.
130년 전 파리의 다락방과 2026년 서울의 청년 주거 문제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주거환경도, 의료제도도 달라졌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는 돈이 커질수록 다른 삶의 선택지가 줄어든다는 문제는 현실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오늘의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것이다. 가난한 청춘은 아름다운 것일까. 아니면 청춘이 견뎌낸 가난을 낭만적이라고 한 것일까.
100~200년 전 탄생한 명작 오페라에는 오늘의 사건사고를 보는 듯한 비극이 담겨 있습니다. 스토킹과 교제살인, 빈곤과 계급 갈등, 가짜뉴스와 권력 남용까지. <오페라 사회학>은 시대를 넘어 반복되는 인간 사회의 비극과 모순을 오페라로 읽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