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12일 화성 예술의전당서 열린 '라 트라비아타'
연인 가문의 명예 위해 사랑 포기한 비올레타의 비극
김수정, 절절한 마지막 노래로 그려내
지역 순회 공연에도 이어진 서울 원작의 완성도
"아들이 성매매 여성과 함께 산다. 아버지는 여성을 찾아가 헤어져 달라고 요구한다. 당신 때문에 내 딸의 결혼이 깨질 수 있다는 이유다.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보다 그 여성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가 중요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속 이야기를 오늘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비올레타는 19세기 파리의 코르티잔이다. 부유한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경제적 후원을 받으며 사교계에 출입하던 여성이다. 그들을 오늘날의 성매매 여성으로 단순히 규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교계의 꽃'이라는 말만으로는 코르티잔의 삶에 얽힌 금전 거래와 사회적 낙인을 설명하기 어렵다.
오페라 속,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와 파리 외곽에서 살며 자신의 재산을 처분해 생활비를 마련한다. 부르주아 가정의 아버지 제르몽은 그 사실을 알고도 이별을 요구한다. 딸의 혼사를 앞두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다. 비올레타의 선의를 인정하면서도 그에게 행복을 포기하라고 설득한다. 존경받는 가족의 체면은 결핵으로 무너져가는 한 여인의 남은 삶을 거둬간다.
지난 12일 화성예술의전당 동탄아트홀에서 열린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는 이 비극의 구조를 파고들었다. 이날 비올레타 역을 맡은 소프라노 김수정은 가부장적 사회가 강요한 희생의 대가를 목소리로 들려줬다. 특히 3막의 아리아 '지난날이여, 안녕(Addio del passato)'부터 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호소력 짙은 가창은 이날 공연의 잊을 수 없는 정점이었다.
2023년 국립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의 한 장면 / 국립오페라단 제공.
이번 공연은 2023년 뱅상 부사르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선보인 프로덕션을 바탕으로 김동일이 연출했다. 원프로덕션은 비올레타의 이야기를 현대의 오페라 리허설과 겹쳐 놓은 극중극이다. 무대 위 피아노는 그 설정을 드러내는 중심 장치다. 이날 3막에 이르러서는 한 여성의 마지막 거처처럼 다가왔다.
베르디는 비올레타가 겪는 상황의 변화를 노래의 방식에 새겼다. 1막 '언제나 자유롭게(Sempre libera)'의 빠른 음형과 화려한 장식은 여성의 자유를 향한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그 사이로 알프레도의 사랑 노래가 들려온다. 자유를 외치는 확신과 사랑에 흔들리는 마음이 음악 안에서 충돌한다.
2막 제르몽과의 긴 이중창에서는 항변과 설득에 무너져 절망과 수용하는 음악이 뒤따른다. 자신의 자유를 외치던 여성이 다른 여성의 결혼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는 순간이다. 3막의 작별은 그 여정의 끝에 놓인다.
9월 11일 화성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알프레도 역 테너 이범주와 비올레타 역 소프라노 윤상아가 3막에서 노래하는 장면(기사는 12일 공연 내용) / 화성예술의전당 제공.
김수정은 인생의 끝을 향해가는 비올레타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이어갔다. 병약한 모습을 위해 누워서 노래해야하기에 많은 체력적 부담에 시달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김수정은 탄탄한 실력으로 노래했다. 제르몽을 맡은 바리톤 김원은 이날 출연진 가운데 가장 일관된 가창의 집중력을 보였다. 가족의 명예를 앞세우는 아버지에서 비올레타의 희생을 이해하고 후회하는 인물로 이어지는 변화도 설득력 있었다. 제르몽은 상대의 선의를 알아보고도 잔인한 요구를 거두지 않는 인물이다. 김원은 그 모순을 품은 아버지를 표현해 극의 무게를 더했다.
알프레도 역의 테너 이충만은 사랑에 몰두한 철없는 청년 역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다만 장면에 따라 편차가 드러난 음정이 몰입을 방해했다. 일부 장면에서는 반음 가까이 낮게 들릴 만큼 음정이 불안정했다. 2막 카발레타에 앞서 피아노 위에 누워 노래한 대목에서야 비로소 음정이 정확하게 들렸다.
9월 11일 화성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른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에서 제르몽 역 바리톤 공병우가 알프레도 역 테너 이범주에게 훈계하는 장면(기사는 12일 공연 내용) / 화성예술의전당 제공.
권민석이 지휘한 코리아쿱오케스트라는 오페라와 발레 무대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공연을 안정적으로 뒷받침했다. 다만 1막 전주곡부터 가슴을 파고드는 듯한 시리고 시린 베르디 특유의 현악적 질감을 충분히 살리지는 못했다. 메트오페라합창단도 큰 무리 없이 역할을 수행했다.
이 프로덕션이 처음 공개된 것은 아니지만, 서울 중심의 무대가 지역 관객을 만났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제작 자원이 재공연으로 이어지고, 서울을 찾기 어려운 관객도 국립오페라단의 레퍼토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프로덕션이라 하더라도 서울과 지역 관객에게 온전히 동일한 경험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서울 공연 이후 이어지는 지역 순회 과정에서 출연진이 새롭게 꾸려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역 간 관객의 기대치와 공연 완성도의 편차를 줄이려면, 초기 기획 단계부터 주요 출연진의 순회 공연 참여를 함께 설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국립오페라단 솔리스트로 활동 중인 소프라노 김수정과 바리톤 김원은 새로운 가능성을 증명했다. 서울 공연이 아닌 지역 순회를 위해 새롭게 조합된 출연진의 무대에서도 역대 손에 꼽히는 인상적인 명장면이 탄생할 수 있음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한편 이날 객석에는 국립오페라단 관계자 다수와 더불어, 프로그램북에는 '재연출'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화성 공연의 연출 실무를 총괄한 김동일이 자리를 지켰다. 김동일은 지난 2023년 국립극장에서 뱅상 부사르가 연출한 '라 트라비아타'의 뼈대를 바탕으로 이날 화성 무대에 맞는 호흡과 동선을 치밀하게 조율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