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한 에르메스 매장. 연합뉴스
프랑스의 한 에르메스 매장. 연합뉴스
세계에서 가장 구하기 어려운 가방으로 꼽히는 초고가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 버킨백의 리셀 가격이 하락하는 추세다. 수천만원의 웃돈을 주고도 구매하기 어렵던 버킨백 물량이 시중에 늘어나고 있어서다. 구매자들 사이에서 단순히 고가의 가방을 넘어 자산처럼 여겨지던 버킨백의 투자 가치에도 의문이 생기는 분위기다.

버킨백 웃돈 '뚝'

글로벌 투자은행 번스타인이 올해 3분기 버킨 25의 중고 거래가격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이 가방의 평균 리셀 가격은 최고가 대비 크게 줄었다. 버킨 25 리셀가가 최고로 치솟았던 시점이 코로나19 여파가 한창이던 2022년인데, 당시 가격은 매장 판매가격 대비 2.6배였다. 하지만 최근엔 1.7배로 집계되면서, 정가 대비 웃돈은 160%에서 70% 수준으로 하락했다.

실제 거래 현장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난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2007년부터 명품 가방 재판매업을 운영해온 영국 릴락블루에서 인기 제품인 검은색 버킨 25 미사용품의 중고 가격이 2022년보다 약 4000파운드(약 760만원) 떨어진 2만4000파운드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에르메스 매장에서 같은 제품을 구매할 경우 가격은 9390파운드다. 여전히 매장 판매가격의 두 배가 넘는 금액에 거래되지만, 과거와 같은 가격 상승을 기대하기는 어려워졌다는 얘기다.
에르메스 버킨백. 한경DB
에르메스 버킨백. 한경DB
버킨백이 높은 가격에 거래될 수 있던 까닭은 에르메스 희소성 전략에 있다. 한 명의 장인이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드는 수작업 방식으로 생산된다고 알려진 버킨백은 공급량이 극도로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매장에서 스카프와 의류, 신발 등 다른 제품을 꾸준히 구매한 VIP 고객에 한해 버킨백을 구매할 기회가 주어진다. 버킨이나 켈리를 구매하기 전에 다른 상품에 수 천 만원 이상을 지출해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구조는 버킨백의 가치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가방을 구하기 어렵다는 점 자체가 욕망을 자극했으며, 중고시장의 높은 가격은 이를 다시 정당화했다. 버킨백을 사기 위해 다른 에르메스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도 늘어났다. 희소성이 구매 욕구를 키우고 높은 재판매 가격이 다시 희소성에 대한 믿음을 강화하는 구조였다.

중고시장에 매물 쏟아지는 버킨

하지만 최근엔 이같은 흐름에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에르메스가 생산시설을 꾸준히 확충하는 동시에 온라인 중고거래 시장이 성장하면서 버킨백을 구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에르메스는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프랑스 내 가죽제품 생산시설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올해에는 프랑스 지롱드 지역에 새로운 공방을 마련했으며, 2027년과 2028년에도 신규 공방을 가동할 계획이다. 2030년까지 노르망디 레장들리 지역에도 공방을 신설해 장인 260명을 채용할 예정이다.

여기에 베스티에르 콜렉티브와 더리얼리얼 등 온라인 중고거래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과거 일부 부유층과 전문 수집가들에게 국한됐던 거래가 대중화됐다. 미국 명품 재판매업체 패션파일에 따르면 이 회사의 버킨백 판매 매물 수는 지난 15년간 32배 늘었다.
에르메스 버킨. 에르메스 홈페이지
에르메스 버킨. 에르메스 홈페이지
투자은행 UBS는 최근 전 세계 중고시장에서 판매 중인 버킨백과 켈리백의 매물 수가 팬데믹 이전보다 6~7배 증가한 것으로 추산했다. UBS는 지난달 에르메스에 대한 투자의견을 '매도'로 낮추면서 중고시장 공급 증가가 브랜드의 희소성에 기반한 사업모델을 약화시킬 가능성을 제기했다.

문제는 중고시장의 변화가 에르메스 매장 내 소비 행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다. 버킨백을 구매할 기회를 얻기 위해 다른 제품을 사들이던 고객들이 중고시장에서 원하는 제품을 곧바로 구매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고 거래가격마저 하락한다면 다른 제품까지 구매하면서 버킨백을 확보하려는 유인도 약해질 수 있다.

그래도 에르메스

그렇다고 버킨백의 인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에르메스는 글로벌 명품시장의 성장 둔화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견조한 실적을 유지하고 있다.

에르메스가 지난달 22일 발표한 올해 3분기 매출은 40억9600만유로로 전년 동기 대비 4.3% 증가했다. 환율 변동 효과를 제외한 수치다. 시장 예상치였던 5.2% 성장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버킨백과 켈리백 등을 생산하는 가죽제품·승마용품 부문 매출은 10.8% 증가했다. 전체 매출 증가율을 크게 웃돌았다.
에르메스 시그니처 컬러 오렌지 패키지. 에르메스 홈페이지
에르메스 시그니처 컬러 오렌지 패키지. 에르메스 홈페이지
희귀 제품의 가격은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지난해 7월 프랑스 파리 소더비 경매에서는 제인 버킨이 실제 사용했던 최초의 버킨백이 858만2500유로(당시 약 1000만달러)에 낙찰됐다. 핸드백 경매 사상 최고가였다. 글로벌 시장 분위기와 달리 명품 수요가 강한 국내에서도 희귀 매물은 물론 일반적인 버킨백의 리셀가도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중이다.

전문가들은 중고시장 전반의 가격 조정과 희귀한 수집품의 가치 변화를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색상과 크기, 가죽 소재, 보존 상태에 따라 버킨백의 가격이 크게 달라지는 데다 일부 고급 제품의 수요는 여전히 탄탄하기 때문이다.

관건은 에르메스가 제품 희소성을 유지하면서 얼마나 성장할 수 있느냐다. 생산량을 지나치게 제한하면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고, 공급을 확대하면 지금까지 브랜드의 가치를 지탱해 온 희소성이 약화할 수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에르메스의 강점은 가방을 비싸게 파는 능력만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다는 믿음을 만들어낸 데 있다”며 “버킨백의 중고 거래가격 하락은 에르메스의 이같은 전략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를 보여주는 한 지표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