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제네바주 벨뷰에 있는 리치몬트 본사. 리치몬트 제공
스위스 제네바주 벨뷰에 있는 리치몬트 본사. 리치몬트 제공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 피아제, IWC, 예거 르쿨트르, 몽블랑….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를 거느린 스위스 명품그룹 리치몬트의 다음 주인은 누가 될까.

리치몬트의 요한 루퍼트 회장(76)은 최근 몇 년 간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 왔다. 1950년생인 그가 일흔을 넘긴 데다, 코로나19 이후 까르띠에와 반클리프 아펠을 앞세운 리치몬트가 빠르게 몸집을 키우면서 명품업계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포스트 루퍼트’로 향한 것이다. 그룹 매출은 2018회계연도 109억7900만유로에서 2026회계연도 224억2000만유로로 8년 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급격히 규모가 커진 회사를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다음 세대로 넘길지가 새로운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유력한 인물로 꼽힌 건 외아들 안톤 루퍼트였다. 다만 루퍼트 회장은 그동안 아들을 경영 후계자로 내세우는 데 선을 그어왔다. 수년째 안톤에 대해 경영진이 아니며 앞으로도 임원이 될 계획이 없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그룹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겼다. 2024년에는 반클리프 아펠을 세계적인 주얼리 브랜드로 키운 니콜라 보스를 그룹 최고경영자(CEO)에 앉혔다.
리치몬트의 요한 루퍼트 회장(왼쪽)과 아들 안톤 루퍼트. WatchPro
리치몬트의 요한 루퍼트 회장(왼쪽)과 아들 안톤 루퍼트. WatchPro
그런데 최근 승계를 둘러싼 분위기가 달라졌다. 리치몬트 그룹은 지난달 39세 안톤을 이사회 비상임 공동 부회장으로 선임하고, 산하 브랜드의 상품과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다루는 위원회까지 맡겼다. 무엇보다 루퍼트 회장이 직접 이번 인사를 “이사회의 장기 승계 계획에서 중요한 단계”라고 규정했다. 과거 아들의 경영 참여와 거리를 두던 태도와는 달라진 모습이다.

주식은 10%인데 의결권은 절반

루퍼트 가문은 주식 10%만으로 까르띠에 제국을 지배하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기준 루퍼트 가문의 지주회사 ‘콩파니 피낭시에르 루퍼트’가 보유한 리치몬트 지분은 10.18%다. 반면 이들이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50.60%에 달한다. 회사 가치의 10분의 1 정도만 보유하고도 주요 의사결정에서는 절반 이상의 힘을 행사하는 셈이다.

비밀은 주식 구조에 있다. 리치몬트 주식은 증시에 상장돼 일반 투자자가 사고팔 수 있는 A주와 비상장 B주로 나뉜다. 이 가운데 B주는 루퍼트 가문의 지주회사가 보유하고 있다. 이 주식에 강력한 의결권이 붙어 있다. 덕분에 외부 투자자가 증시에서 리치몬트의 A주를 대량으로 사들여도 루퍼트 가문의 동의 없이 그룹의 지배권을 가져가기는 어렵다. 주식시장에는 회사 문을 열어놓되 경영권으로 향하는 문에는 사실상 빗장을 채운 셈이다.
까르띠에 러브 컬렉션. 까르띠에 제공
까르띠에 러브 컬렉션. 까르띠에 제공
시장에서 이 같은 지배구조는 오래전부터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일반 주주의 경제적 이해관계와 실제 의결권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이유에서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루퍼트 가문이 실제 보유한 지분에 비해 지나치게 큰 영향력이 주어진다고 비판해왔다. 일반 주주들이 회사 자본의 대부분을 부담하면서도 경영진 교체나 지배구조 변화에는 충분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그룹의 경영 성과가 부진해도 외부 주주들이 지배주주를 견제하기 어렵고, 강력한 경영권이 다음 세대로 그대로 넘어갈 수 있다는 점도 논란거리가 됐다.

“3개월 뒤 떠날 사람들보다 중요한 건…”

하지만 루퍼트 회장은 리치몬트의 성장에는 이같은 지배권이 효과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여기고 있다. 명품 브랜드는 당장 한두 분기 실적보다 장인을 키우고 생산 시설을 확충하고, 매장과 브랜드 이미지를 관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 주주의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하려면 안정적인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루퍼트 회장은 2022년 ‘지분 10%로 의결권 절반을 행사하는 것은 과도하다’며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한 행동주의 펀드 자 블루벨캐피털과 갈등을 벌였을 때도 이같은 가치관을 드러냈다. 그는 복수의결권 구조를 바꿀 이유가 없다며 “3개월 뒤 떠날 사람들(단기 투자자)보다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들과 주주를 지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취지로 주장해 왔다. 가문이 강한 의결권을 갖는다고 해서 이를 사적 이익을 위해 이용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폈다. 그는 1988년 리치몬트 설립 이후 가족 지주회사가 일반 주주와 같은 조건으로 배당을 받은 것 외에는 회사로부터 수수료나 로열티 등을 받은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반클리프앤아펠 목걸이를 착용한 모델들. 리치몬트 제공
반클리프앤아펠 목걸이를 착용한 모델들. 리치몬트 제공
공교롭게도 안톤의 승계 가능성이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당시 루퍼트 회장은 처음으로 자신의 승계 계획이 존재한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다만 후계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당시 그는 안톤에 대해서도 “경영진이 될 계획은 없다”고 단언하면서도, 아들이 이사회에 있는 이유에 대해 회사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안톤의 역할이 이사회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명품 제국의 중심엔 여전히 창업가문

이번 아들 안톤의 부회장 선임으로 리치몬트 그룹의 경영 구조는 보다 명확해졌다.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장기 방향과 지배력은 가문에’라는 승계 구도를 보다 선명하게 만들었다는 해석이다. 리치몬트의 일상적인 경영은 전문경영인 니콜라 보스 CEO가 계속 책임진다. 대신 안톤은 이사회에서 그룹 산하 메종의 창의성과 상품 전략을 챙기는 역할을 맡는다. 또 다른 공동 부회장인 브람 쇼트가 이사회와 지배구조를 담당하는 식으로 역할도 나눴다. 안톤은 ‘경영자’라기보다 리치몬트가 수십 년간 구축한 브랜드와 지배구조를 지키는 ‘가문의 관리자’에 가까운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큰 셈이다.

세계 명품기업들이 가문의 지배력을 유지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지만, 오랜 시간 브랜드를 키우고 경영권을 지키는 중심에는 여전히 창업가문이 자리하고 있다.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은 다섯 자녀를 그룹의 주요 브랜드와 경영 요직에 배치해 경영 경험을 쌓게 하고 있다. 에르메스는 창업자 티에리 에르메스의 후손들이 가족 지주회사 등을 통해 지분을 묶어 외부의 인수 시도를 막고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리치몬트는 산하에 20여 개 명품 브랜드와 관련 사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각 브랜드가 독립적인 제조시설과 마케팅 전략, 고객층을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며 “지금도 산하 브랜드를 단순한 사업부가 아니라 각각의 ‘메종’으로 부르는 데는 브랜드별 역사와 장인 문화, 디자인 정체성을 최대한 지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이어 “경영 효율은 높이되 각 메종의 독립성은 훼손하지 않는 이런 방식을 장기간 유지하려면 단기 실적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지배구조가 필요하다는 게 리치몬트의 기본 철학”이라고 덧붙였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