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침사추이 명품거리의 루이비통 매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홍콩 침사추이 명품거리의 루이비통 매장.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002년 11월 세계 최대 명품 그룹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의 한 고위급 인사는 에르메스 창업가문 상속인이 고용한 자산관리인과 한 계약을 맺었다. 계약서에 서명한 사람은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의 오랜 측근이었던 피에르 고데와 에르메스 창업가문 5세 니콜라 퓌에슈의 자산관리인 에릭 프레몽. 이들이 합의한 내용은 에르메스 일가가 보유한 주식 수백만주를 LVMH로 파는 것이었다. 이 일을 아는 이가 극소수일 정도로 극비로 이뤄진 계약이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2010년 10월, 파리 명품업계는 술렁였다. LVMH 그룹은 수년이 지나 에르메스 지분 17% 이상을 갖고 있다고 발표했다. 에르메스 입장에선 예상하지 못했던 거대 주주의 등장이었다. LVMH는 “에르메스의 경영권을 확보할 의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에르메스 가문이 받아들이는 무게감은 달랐다. 1837년 창업 이후 몇 세대에 걸쳐 독립 경영을 유지해온 에르메스다. 세계 최대 명품그룹이 주요 주주로 들어온 건 경영 방식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였다. 두 명품기업의 ‘지분 전쟁’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에르메스에 눈독 들인 LVMH

로이터통신의 보도에 따르면 최근 니콜라 퓌에슈와 LVMH 간 프랑스 민사소송 관련 법률 문서를 통해 24년 전 계약서의 존재가 공개됐다. LVMH는 이 계약이 실제 집행되지는 않았다는 입장이다.

LVMH의 에르메스에 대한 관심은 200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금융시장청(AMF) 조사에 따르면 LVMH는 2001~2002년 두 개 자회사를 통해 이미 에르메스 지분 4.9%를 확보했다. 2008년 이후에는 파생상품 계약을 활용해 에르메스 주식에 대한 경제적 이해관계를 빠르게 늘렸다.
에르메스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본점 외관.
에르메스 파리 포부르 생토노레 본점 외관.
LVMH는 최대한 눈에 드러나지 않는 방식으로 에르메스 주식을 확보해 나갔다. 시장에서 에르메스 주식을 대량으로 직접 매입하면 지분 확대 사실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LVMH는 금융회사들과 계약을 맺어 향후 에르메스 주식을 넘겨받을 수 있는 구조를 활용했다.

2010년 10월이 되어서야 이 금융계약을 실물 주식으로 전환했다. LVMH가 에르메스의 거대 주주가 됐다는 사실이 10년 만에 인지됐다. 지분율은 이미 17%를 넘어섰다. 몇 달 뒤인 12월에는 20.21%까지 늘었다. 물론 LVMH는 인수 의도를 부인했다. 투자 목적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에르메스 가문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달랐다. 에르메스 측은 LVMH의 지분 매입 과정을 경영권의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방어 절차에 돌입했다. 가족들이 가지고 있던 에르메스 지분 가운데 50% 이상을 별도 지주회사에 묶는 작업에 나섰다. 가족 지주회사인 ‘H51’이다. 상속인 중 한 명이라도 마음을 바뀌어 지분을 외부에 대량으로 팔더라도 에르메스 전체의 경영권까지 흔들리지 않도록 한 일종의 방어 장치였다.

LVMH가 에르메스 지분을 늘리는 과정을 두고 금융 시장에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AMF는 2013년 LVMH가 파생상품을 활용해 에르메스 지분 확대를 준비하면서 관련 정보를 시장에 제때 공개하지 않았다며 800만유로의 제재금을 부과했다. AMF는 시장과 주가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금융거래였기 때문에, 일정 시점부터 그 준비 사실을 시장에 공개했어야 한다고 봤다.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명품 거리의 루이비통 매장. 사진=한경DB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명품 거리의 루이비통 매장. 사진=한경DB
결국 2014년 LVMH는 보유하고 있던 에르메스 지분 대부분을 자사 주주들에게 나눠주기로 했다. LVMH 주식 41주를 가진 주주에게 에르메스 주식 2주를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세계 최대 명품그룹과 에르메스 가문의 사이에 벌어진 지분 갈등은 그렇게 끝나는 듯했다.

사라진 지분 6%의 진실

최근 이 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니콜라 퓌에슈는 자신이 보유했던 에르메스 지분 약 6%를 잃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약 100억달러(약 13조4700억원) 규모다. 에르메스 창업가문의 5세인 그는 한때 개인으로는 가장 많은 에르메스 주식을 보유한 주주 가운데 한 명이었다. 퓌에슈는 자신의 자산을 관리했던 프레몽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식을 처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이 확인한 법원 자료에 따르면 LVMH와 아르노 일가의 회사들은 2001년부터 2009년까지 프레몽이 소유한 회사에 수수료 등을 포함해 2000만달러(약 269억원) 이상을 지급했다. 프레몽은 LVMH가 초기 에르메스 지분을 취득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그 자산 관리인이다. 물론 프레몽 측은 퓌에슈가 잃었다고 주장하는 에르메스 주식과 LVMH가 당시 확보했던 주식은 각각 다른 주식이라 주장하고 있다. LVMH 역시 퓌에슈의 주식을 부당하게 취득했다는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2002년 계약도 실제 집행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에르메스 제품을 만들고 있는 장인. 사진=에르메스 홈페이지
에르메스 제품을 만들고 있는 장인. 사진=에르메스 홈페이지
20여 년 전 사건이 명품업계 안팎에서 관심을 끄는 건 당시의 지분 계약 사건 이후로 LVMH와 에르메스의 성장 방식에 중대한 차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후 아르노 회장의 LVMH는 인수합병(M&A)을 성장의 핵심 수단으로 삼았다. 루이비통과 디올을 중심으로 셀린느, 펜디, 로로피아나, 불가리, 티파니 등 여러 브랜드를 잇달아 품으며 세계 최대 명품그룹으로 몸집을 키웠다.

반대로 에르메스는 거대 그룹에 편입되지 않고 창업가문의 지배구조를 유지하는 전략을 공고히 했다. 생산량을 공격적으로 늘리기보다 장인 생산과 제한된 공급을 유지하며 희소성을 키웠다. 이 전략은 최근 명품시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에르메스의 올해 상반기 매출은 81억6300만유로로 전년 동기보다 환율 영향을 제외하고 6.1% 증가했다. 영업이익률은 41.0%에 달했다. 현재 에르메스를 성장케한 강력한 가족형 독립 구조가 LVMH의 지분 확보 위협에서 형성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