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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대신 에나멜·모래…명품이 '값싼 소재'에 꽂힌 이유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안혜원의 명품의세계] 108회
"귀중함에 질문을 던진다"
명품의 가치는 어디서 올까
"귀중함에 질문을 던진다"
명품의 가치는 어디서 올까
19일 업계에 따르면 반클리프 아펠의 새로운 에나멜 알함브라 제품은 옐로 골드 소재의 20개 모티브 롱 네크리스와 10개 모티브 네크리스, 5개 모티브 브레이슬릿, 펜던트, 이어링 등 5종으로 구성됐다. 반클리프 아펠이 이번에 내세운 것은 에나멜 자체보다 이를 구현한 기술이다. 브랜드에 따르면 핑크색 에나멜은 자체 에나멜 공방에서 수년에 걸쳐 연구·개발됐다.
17세기의 이른바 ‘골드 루비(gold ruby)’ 공정에서 영감을 받은 기법으로 색상을 구현했다. 완성된 에나멜은 강렬한 핑크색과 반투명한 질감이 특징이며 내부에는 미세한 기포가 나타난다. 반클리프 아펠은 1906년 장식 오브제부터 1920년대 파우더 콤팩트와 배니티 케이스, 최근의 워치 컬렉션까지 에나멜을 활용해왔지만 알함브라에 적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소비자 반응은 엇갈린다. 명품 커뮤니티와 SNS에서는 에나멜 특유의 투명감과 기포를 두고 “플라스틱처럼 보인다”, “레진 같은 느낌”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물론 실제 제품을 본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다”, “딸기잼처럼 깊고 선명한 색감”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가격을 둘러싼 논쟁도 있다. 일부 소비자는 천연 원석 대신 에나멜을 사용한 제품에 기존 알함브라와 비슷한 수준의 가격을 지불하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에나멜 자체의 원재료 가격보다 수년에 걸친 색상 개발과 세공 기술에 가치를 둬야 한다는 반론도 나온다.
2022년에는 산업폐기물을 가공해 만든 ‘코팔리트(Cofalit)’를 대표 컬렉션 ‘잭 드 부쉐론’에 적용했다. 코팔리트는 특정 산업폐기물을 유리화하는 공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소재다. 원래 고속도로 제방 등에 주로 쓰인다. 부쉐론은 이를 재활용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재활용이 불가능한’ 소재로 설명한다. 주얼리용 소재로 사용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연구와 가공 과정을 거쳤다.
이어 알루미늄과 마그네슘도 주얼리 재료로 활용했다. 금보다 각각 약 8배, 10배 가벼운 소재에 다이아몬드를 세팅했다. 지난해에는 2025년에는 모래까지 주얼리 재료로 활용했다. 부쉐론의 ‘콰트로 샌드 커프’는 3D 샌드 프린팅 기법을 사용해 검은 모래와 옐로 골드를 층층히 굳혀 만든 제품이다. 금과 보석처럼 원래 비싼 물질만이 명품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공식을 잇달아 깨뜨리고 있는 셈이다.
명품업계가 앞다퉈 새로운 소재를 찾는 것은 ‘희소성’을 만드는 방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최고급 가죽과 희귀 원석처럼 구하기 어려운 원재료 자체가 고가 제품의 가격을 설명했다. 하지만 원재료 조달을 둘러싼 환경·윤리 문제가 커지고 소비자 취향도 세분화되면서 브랜드만이 구현할 수 있는 색과 질감, 가공 기술이 새로운 차별화 수단으로 부상했다.
특히 수십 년 된 대표 디자인을 보유한 명품 브랜드에는 소재 혁신이 오래된 아이콘을 다시 팔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알함브라의 네잎클로버, 부쉐론의 콰트로처럼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되 소재와 색깔만 달리해 전혀 다른 신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귀함’을 결정하는 기준도 변하고 있다. 명품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비싼 재료를 얼마나 많이 넣었느냐보다 흔한 소재, 심지어 버려지는 소재를 다른 누구도 만들 수 없는 물건으로 바꾸는 기술과 디자인이 가격을 결정하는 시대라는 시각이 많다. 부쉐론은 신소재 제품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귀중함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진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안혜원 기자 an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