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등교육이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다. 학령인구 급감과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세계 주요 대학들은 첨단 연구 인프라를 확충하고 혁신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미래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오늘날 대학은 초고성능 AI 인프라와 대형 연구장비를 구축하는 것은 물론, 글로벌 교류 및 현장실습과 융합 교육 플랫폼을 확대하여 학생들의 경쟁력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립대학들은 이를 위한 투자 재원을 계획적으로 축적하기 어렵다. 개인과 기업은 장래의 성장과 예측 불가능한 불확실성에 대비해 소득의 일부를 저축한다. 반면 대학은 교육과 연구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자율적으로 축적하는 데 법적 제약을 받고 있다. 세계적 수준의 경쟁력을 요구하면서도,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저축'은 법으로 봉쇄해 놓은 셈이다.
그 출발점은 등록금 상한제의 도입과 함께 2011년 신설된 '사립학교법' 제32조의2 제1항이다. 당시 정부는 등록금 인상을 억제하고 학생이 납부한 등록금이 당해 연도 교육에 즉시 사용되도록 유도한다는 명분으로 등록금회계의 적립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현행 법령이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적립 범위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동 조항 단서는 등록금회계에서 적립할 수 있는 대상을 오직 '건축적립금'으로 한정하고, 그 규모마저 해당 연도 건물의 '취득원가 기준 감가상각비' 상당액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이 규제는 제도의 취지와 수단이 상충하는 전형적인 형식 논리'에 빠져 있다. 입법 취지는 건물의 수명이 다했을 때 신축을 대비하라는 것이지만, 회계상 감가상각비는 수십 년 전 과거 취득가액을 단순히 비용으로 배분한 장부상 금액에 불과하다(통상 가액의 40분의 1). 치솟은 물가와 공사비를 감안할 때 과거 가격에 묶인 감가상각 한도로는 노후 건물의 개축이나 미래형 시설 구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가 '건축 대비'라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정작 현실적으로 신축이 불가능한 수준으로 한도를 가둬둔 것은, 이 제도가 실질적인 미래 대비용이라기보다 등록금 유출을 막기 위한 기술적 통제 장치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 큰 문제는 오늘날 대학의 미래 투자가 단지 '벽돌 쌓기(건축)'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형 AI 인프라 구축, 첨단 연구 장비 도입, 글로벌 융합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 고등교육의 질을 결정짓는 핵심 자산은 단년도 소모성 예산으로는 결코 마련할 수 없으며, 수년에 걸친 장기 계획과 재원 축적이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현행법은 건축 외의 모든 교육·연구 인프라를 위한 적립은 일절 불허하고 있다.
일각에서 "대학 재정에서 등록금 비중이 절반 수준(2025년 기준 48.1%)에 불과하고, 기부금이나 정부 지원금 등 다른 재원이 존재하는데 왜 굳이 학생들의 등록금을 적립하려 하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재원의 '액수'만 볼 뿐 재원의 '성격'과 '자율성'을 간과한 치명적 오해다. 정부 재정지원금은 특정 국책 사업에 묶여 있어 기간이 끝나면 반납해야 하고, 연구비 간접비나 기부금 역시 사용 목적과 범위가 엄격히 지정된 '용도지정 재원'이다. 대학이 5년, 10년 뒤를 내다보며 교육·연구 체질을 바꿀 수 있는 핵심적인 자율 재원은 등록금이다.
아울러 "등록금은 당해 연도 재학생을 위해 그해에 다 써야 한다"는 주장 역시 교육을 '단기 소모품'으로 보는 좁은 시각이다. 등록금을 원래 취지대로 학생을 위해 쓴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대학의 연구·교육 환경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여 학생이 졸업한 후에도 그 학위의 브랜드 가치가 평생에 걸쳐 빛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의 재학생들 역시 앞선 선배들과 대학이 수십 년간 축적해 놓은 유산을 누리며 입학한 수혜자들이다. 등록금을 단년도에 소진해 버리지 않고 장기 플랜에 따라 축적하고 투자하는 것은 '세대 간 선순환 계약'을 이어가는 정당한 행위다.
이제 대학 재정·회계 제도는 2011년의 통제 중심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오늘의 교육 현실에 맞게 다시 설계되어야 한다.
우선은 '사립학교법' 제32조의2 제1항 단서를 개정하여, 단기 소모성 경비의 무분별한 유보는 제한하되, 첨단 연구 장비 도입, AI 인프라 구축, 중장기 교육 프로그램 개발 등 '교육·연구 인프라 목적적립금'을 합리적 범위 내에서 전향적으로 허용해야 한다.
아울러 건축적립금 한도 역시 과거 취득원가가 아닌 물가 상승률과 실제 대체원가를 반영할 수 있도록 현실화해야 한다.
대신 적립 목적과 중장기 집행 계획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그 성과와 책임을 사후에 엄격히 평가하면 된다.
대학은 주어진 예산을 당해 연도에 소진하기만 하는 단순 예산 집행기관이 아니라, 국가의 미래를 일구고 준비하는 유기체다. 2011년의 과도한 규제로 대학의 손발을 묶어둔 채 세계적 경쟁력을 요구하는 것은 정책적 모순이다. 과거의 규제로 미래를 열 수는 없다. 이제 대학도 미래를 위해 계획적으로 저축하고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대학을 열망하는 국가가 보장해야 할 최소한의 제도적 기반이자 시대적 요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