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간식을 즐기고 담소를 나누는 피카(Fika)를 통해 삶의 여유를 찾는다. ©스웨덴 예테보리
스웨덴에서는 커피를 마시며 간식을 즐기고 담소를 나누는 피카(Fika)를 통해 삶의 여유를 찾는다. ©스웨덴 예테보리
몇 해 전 스웨덴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다. 볼보의 고향이자 영토의 63%가 삼림인 이 나라는 길고 혹독한 겨울 탓에 1년의 반 이상을 어둠 속 빙판길과 싸워야 한다. 게다가 도심의 경우 하루 주차비가 8만 원에 육박하고 리터당 3천 원을 넘나드는 기름값 탓에 자동차 여행자에게는 친절하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이 엄격한 환경 속에서도 스웨덴 사람들의 삶은 묘하게 평온했다. 그 중심에는 과소비를 지양하고 딱 필요한 만큼의 삶을 추구하는 ‘라곰(Lagom)’이라는 시대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명품 가방 대신 튼튼한 왜건에 유모차를 싣고 주말 숲으로 떠나는 삶. 거리의 이케아 매장에서 볼 수 있는, 과하지 않지만 세련된 거실 인테리어. 스웨덴 사람들에게 럭셔리란 남에게 과시하는 겉치장이 아니라, 거친 대자연으로부터 내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내고 일상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을 누리는 ‘안식처’ 그 자체였다.

'사장님 차'의 견고한 문법을 부수다

최근 한국 프리미엄 수입차 시장을 흔들고 있는 볼보자동차의 파격적인 행보는 바로 이러한 스웨덴식 실용주의와 안전 철학에서 기인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억 원을 호가하는 대형 플래그십 세단 시장의 문법은 명확했다. 보닛 아래 자리 잡은 육중한 8기통 엔진, 실내를 휘감은 번쩍이는 크롬과 광활한 가죽 그리고 타인의 시선을 압도하는 권위적인 하차감. 메르세데스-벤츠 S클래스와 BMW 7시리즈가 수십 년간 굳건히 쌓아 올린 이 철옹성은 결코 무너지지 않을 럭셔리의 절대 공식처럼 보였다.
'사장님 차' 특유의 권위를 비우다… 볼보가 다시 쓴 플래그십車 공식 [조두현의 테이스티드라이브]
하지만 지난 7월, 볼보자동차가 차세대 전기 플래그십 세단 ES90을 국내에 전격 출시하며 이 견고한 공식에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인 균열을 냈다. 앞서 선보인 대형 SUV EX90과 함께 볼보가 플래그십의 기준을 다시 쓰려고 하는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파격은 가격표다. 1회 충전으로 최장 706㎞(WLTP 기준)를 너끈히 달리는 이 거대한 플래그십 세단의 시작 가격은 7,294만 원이다. 대형 SUV인 EX90 역시 1억 원 초반대에 안착했다. 테슬라가 촉발한 전기차 가격 전쟁 속에서, 독일 3사가 독점하던 ‘1억 원 이상 하이엔드 시장’의 진입 장벽을 허문 것이다. 실내의 철학 역시 궤를 달리한다. 경쟁자들이 앞다투어 실내 전체를 거대한 디스플레이로 덮고 네온사인 같은 앰비언트 라이트로 미래적인 느낌을 과시할 때, 볼보는 오히려 화려함을 덜어내는 ‘비움(Minimalism)’을 택했다.

화려한 천연 나파 가죽 대신 재활용 소재를 활용한 테일러드 울 혼방 직물을 두르고, 스웨덴 남부 스몰란드(Småland)의 숲에서 영감을 얻은 오레포스 크리스털 기어 노브로 포인트를 줬다. 시각적 인지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UI는 극도로 단순화됐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권위적인 공간이 아니라, 도심의 소음과 피로로부터 탑승자를 완벽히 분리해 내는, ‘움직이는 북유럽 라운지’가 현대 부호들의 새로운 지향점이 된 셈이다. 최근 패션계에서 로고를 감추고 소재의 본질에 집중하는 ‘콰이어트 럭셔리(Quiet Luxury)’가 대세가 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마력의 자리를 대체한 컴퓨팅 파워

물론 콧대 높은 하이엔드 생태계에서 이러한 볼보의 이단아적 행보를 향한 의구심도 적지 않다. 7천만 원대의 가격표는 대중성을 얻을 순 있지만, 럭셔리의 본질인 초월적 희소성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다. 직물 소재와 미니멀리즘 인테리어 역시 보수적인 소비자들에겐 스웨디시 감성으로 예쁘게 포장한 원가절감이라는 뼈아픈 지적을 받기도 한다. 모기업인 중국 지리자동차의 플랫폼을 공유한다는 태생적 꼬리표도 여전히 넘어야 할 산이다.
볼보 ES90
볼보 ES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보의 이번 행보가 단순한 틈새시장 공략을 넘어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읽히는 이유는 기술의 권력 이동을 가장 정확히 짚어냈기 때문이다. ES90과 EX90은 스스로를 ‘소프트웨어로 정의되는 자동차(SDV)’라 부른다. 내연기관의 굉음이 사라진 자리는 ‘휴긴 코어(Hugin Core)’라는 지능형 플랫폼이 채웠다. 과거 플래그십의 상징이 폭발적인 마력(Horsepower)이었다면, 이제는 차가 얼마나 도로를 촘촘히 읽어내고 스스로 진화하는가를 뜻하는 컴퓨팅 파워가 럭셔리를 결정짓는 시대가 온 것이다. 초당 254조 회를 연산하는 엔비디아 오린 프로세서가 루프에 탑재된 라이다(LiDAR)를 비롯한 수십 개의 센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해 낸다. 구매한 순간부터 구형이 되던 과거의 내연기관과 달리, 무선 업데이트(OTA)를 통해 매일 조금씩 똑똑해지는, ‘늙지 않는 차’의 탄생이다.

1959년의 3점식 안전벨트, 2026년의 라이다(LiDAR)

볼보 EX90
볼보 EX90
전기차 캐즘(Chasm)과 배터리 포비아가 도사리는 작금의 시대에 첨단 소프트웨어로 고도화된 볼보의 안전 철학은 그 어떤 화려한 장식보다 강력한 럭셔리의 무기가 된다. 예테보리의 ‘월드 오브 볼보’에 가면 1959년 엔지니어 닐스 보린(Nils Bohlin)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3점식 안전벨트가 전시돼 있다. 당시 볼보는 이 엄청난 발명품의 특허권을 전 세계 완성차 업체에 무상으로 개방했다.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돈을 벌지 않겠다는 이 숭고한 양보는 오늘날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했고, ‘볼보=안전’이라는 공식을 전 세계에 각인시켰다.
볼보 PV 544에 장착된 3점식 안전벨트
볼보 PV 544에 장착된 3점식 안전벨트
반세기가 훌쩍 지난 2026년, 볼보는 강철 프레임으로 빚어내던 기계적 안전을 넘어 소프트웨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 250m 밖의 위험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감지해 내는 라이다 센서, 충돌 시 0.02초 만에 고전압 배터리를 차단하는 집요함은 1959년 3점식 안전벨트가 보여주었던 인간 중심 철학의 디지털 진화 버전이다. 치열한 도로 위, 우리의 가족을 태운 자동차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도로의 시선을 빼앗는 권위적인 엠블럼인가, 아니면 그 어떤 돌발 상황에서도 당신을 완벽히 보호해 줄 보이지 않는 스웨덴식 요새인가? 볼보 ES90과 EX90은 화려한 포장지를 벗어 던지고 럭셔리의 가장 고귀한 본질인 ‘안전과 평온함’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쩌면 진짜 럭셔리는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가장 안전하게 다독이는 데서 시작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