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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본 유럽 하늘이 서울 하늘과 달랐던 이유 [조수민의 빛이 채우는 시간]
위도 55도가 부리는 두 가지 마법
파랑의 깊이와 길이
파랑의 깊이와 길이
유럽에서 찍은 사진은 왜 그렇게 멋져 보일까.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이라면 한 번쯤 품어봤을 질문이다. 오래된 건물 때문이기도 하고, 낯선 거리의 사람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그 답의 절반 이상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하늘의 '파랑'에. 그리고 코펜하겐의 파랑에는 다른 도시들과 구별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깊이, 또 하나는 길이다.
남다른 파랑의 깊이
햇빛은 대기를 통과하며 파장이 짧은 푸른빛을 사방으로 흩뿌린다. 하늘이 파란 이유, 레일리 산란(Rayleigh scattering)이다. 여기까지는 지구 어디서나 같다. 그런데 코펜하겐에는 다른 한 가지가 있다. 위도다. 서울이 북위 37.5도인 데 반해 코펜하겐은 55.7도. 위도가 높아질수록 태양은 하늘 높이 솟는 대신 지평선 가까이에서 비스듬히 도는 궤적을 그린다. 한여름에도 해가 높이 뜨지 않아, 이곳의 최대 고도는 우리의 4월 초 무렵과 비슷하다.
이 파랑을 연색 조도계로 확인해 보았다. (이걸 하고 싶어 여행지에 굳이 고가의 장비를 챙겨갔다.) 건물 그늘에서 직접 잰 색온도가 8400K(캘빈)을 가뿐히 넘었다. 우리가 흔히 푸른 백색광이라고 하는 주광색이 6500K 정도이니, 8400K은 눈에 띌 정도로 푸른 색이다. 한국에선 아주 청명한 일부 가을 하늘에나 느낄 수 있는 정도의 색이 이곳에선 쉽게 볼 수 있는 색이다.
문득 서울의 여름 하늘이 떠올랐다. 우리의 여름 공기는 습도가 높아 수증기와 에어로졸 입자가 많고, 이 굵은 입자들은 파장을 가리지 않고 빛을 흩뿌린다. 그래서 한여름 서울의 하늘은 파랑보다 옅은 하늘색 또는 옅은 회색에 가까워진다. 같은 그늘인데도 코펜하겐의 그늘이 더 깨끗하고 차갑게 느껴졌던 이유다.
길고 짙은 파랑, 그리고 스카겐의 예술가들
코펜하겐의 빛이 다른 건 깊이만이 아니다. 처음 공항을 빠져나와 코펜하겐 시내에 도착한 시간은 저녁 열시가 되어서였다. 역을 나온 우리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아직 밝은 하늘이었다. 시계는 분명 열 시를 넘기고 있었는데, 하늘은 아름다울 정도로 짙푸른 파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빛을, 이 도시는 도착 첫 순간에 꺼내 보여주고 있었다.
푸른빛을 대기에 빼앗긴 태양이 오렌지색으로 물들며 세상을 꿈처럼 만드는 시간을 골든 아워(Golden Hour)라 부른다면, 해가 진 뒤 태양은 숨고 하늘만 깊고 푸른 기운으로 남는 시간은 블루 아워(Blue Hour)라고 한다. 야경의 사진이 가장 잘 나오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전히 캄캄한 밤하늘보다, 어스름한 푸른 하늘 사이에 펼쳐지는 빛들이 가장 멋진 저녁시간의 장면을 만든다. 조명 설계회사에 다니며 현장 사진을 찍을 때는 해지기 전 미리 도착해 짧게 지나가는 이 시간을 기다렸다가 서둘러 사진을 찍곤 했다.
한국에서는 그토록 금방 지나갔던 멋진 이 블루 아워의 시간이, 위도 55도에서는 해가 누운 각도만큼 길게 늘어나 하루 중 가장 긴 장면이 된다. 덴마크의 하늘을 더욱 인상적으로 만드는 두 번째 마법이다. 빛은 순간의 상태가 아니라 시간을 가지고 움직이는 물질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예술의 어떤 부분은 재능이 아니라 태어나 자란 주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웃어야 할지 부러워해야 할지 모를 생각을 나는 그 하늘 아래에서 했다. 그런데 이 하늘 아래에서 살아간 것은 화가들만이 아니었다.
각자의 위치가 만든 빛의 환경, 그리고 그들의 디자인
자연광의 느린 소멸에 익숙해진 신체는 인공조명의 취향까지 결정한다. 급격한 명암 전환에 길든 눈과 한없이 느린 그라데이션에 길든 눈은 '편안한 빛'의 기준 자체가 다르다. 덴마크 사람들이 낮은 색온도와 낮은 조도를 본능처럼 선호하는 뿌리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망막과 뇌에 새겨진 좋은 빛은, 이미 자연이 그렇게 길들여 놓은 것이다.저녁 산책 중에 카페와 가정집 창가를 보면 촛불에 가까운 색의 작은 조명들이 낮게 켜져 있다. 누군가는 어둡다고 느낄지 모르는 그 빛은, 창밖에서 두 시간째 이어지고 있는 황혼과 한 몸으로 이어져 있었다. 실내의 빛이 바깥의 빛과 싸우지 않는 것이다. 해가 순식간에 떨어져 실내가 서둘러 밝아져야 하는 서울의 저녁과는, 빛의 이어달리기 방식 자체가 달랐다.
그리고 그 번역은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남겼다. 전구를 갓 뒤로 감춰 눈부심을 지운 조명, 식탁 위 60센티미터까지 내려온 펜던트, 색유리 없이 벽돌의 색으로 빛을 물들인 교회, 커튼을 치지 않아도 서로 톤이 맞는 창문들. 나는 그것들을 '북유럽 감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리고 싶지 않다. 하나하나가 이 하늘 아래에서 정확한 이유를 가지고 도달한 답이기 때문이다.
그 생각 끝에서, 뜻밖에도 서울의 하늘이 돌연 그리워졌다. 우리의 해는 빠르게 지고 여름 하늘은 뿌옇다. 그 대신 노을은 짧은 시간에 온 힘을 다해 타오르고, 장마가 지나 대기가 씻긴 가을이면 우리에게도 '높다'고 부를 수 있는 하늘이 온다. 코펜하겐이 여름 내내 가진 파랑을 우리는 가을에 몰아서 받는 셈이다. 남의 파랑을 부러워하며 서 있던 그 골목에서, 나는 우리가 이미 가진 하늘에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답도 우리의 하늘 앞에서 찾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