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시대에 필요한 빛을 고민하는 조명 디자이너. 조명 설계를 하면서 빛에 과도하게 빠져 세상 모든 것을 빛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책 <빛의 얼굴들>을 썻고, 조명브랜드 <뷜로>를 만들었다. 대학에서 빛을 가르치고 있으며, 빛을 주제로 다양한 기업들과 협업하고 있다.
놀랍게도 반딧불은 별보다 밝다언젠가 마주했던 여행지의 밤을 기억한다. 풀벌레 소리가 가득한 숲속, 나무들 사이로 둥글게 열린 하늘에는 도시에서 볼 수 없던 별들이 가득했다.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눈앞 풀숲으로 반딧불 하나가 느리게 떠올라 어둠 사이를 천천히 가로질렀다. 멀리 빛나는 별과 가까이 떠다니는 반딧불이 한 화면에 담긴, 오래도록 인상에 남은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런데 지금 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날 밤 내 눈에 실제로 더 밝게 닿은 빛은 저 수많은 별이 아니라 눈앞을 스쳐 간 그 작은 반딧불이었다.이 말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는 빛나는 존재를 늘 ‘별’에 비유하니까. 최근 전 세계가 우리 가수들의 음악에 열광하고, 익숙한 얼굴들이 세계 시상식에서 축하를 받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마주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유명한 사람들을 우리는 ‘스타’라 부른다. 밤하늘에 떠 있는 반짝이는 별과 같다는 의미에서다. 어울리는 비유다. 별은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밝으니까.밤하늘의 별은 실제로 얼마나 밝을까. 우리에게 익숙한 북극성은 태양보다 2500배 밝다. 태양 하나도 그토록 밝은데, 그런 태양을 2500개 모아놓았다고 상상하면 그 밝기가 아주 조금은 가늠이 된다. 이렇게 압도적인 밝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서 가장 밝고 반짝이는 존재는 늘 별의 차지였다.그런데 우리가 약하게 여기는 한낱 반딧불이, 그 북극성보다 밝다면 어떨까.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것 같은 대결이지만, 놀랍게도 이는 과학적으로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몇 해 전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나는
구글과 아마존 같은 세계적 IT 기업은 자신들의 서비스 속도를 밀리초 단위로 측정한다. 페이지 로딩이 늦어질 때마다 매출이 얼마나 줄어드는지 연구하기 위해서다. AI의 발전으로 수많은 기업은 연산 속도를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반도체 회사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하며 인프라를 구축한다.3억 년에 1초도 틀리지 않는 원자시계와 수많은 인공위성으로 전 지구가 동시(同時)성을 공유하는 세상에서, 지연(遲延)은 그야말로 죄악이 된 시대다. 그런데 그 한복판에서, 아이러니하게 결과를 즉각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느리게 내보내기 위해 공을 들이는 분야가 있다. 바로 '빛' 이야기다.LED는 완벽한 광원이다.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0에서 100으로, 지연 없이, 깜빡임 없이, 정확하게 켜진다. 반도체 소자답게 디지털 신호에 즉각 반응하고, 이론적으로 지연 시간은 0에 수렴한다. 효율적이고, 오래가고, 밝다. 인류가 만든 이래 기술적으로 이보다 더 완벽한 조명은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완벽함이 문제가 되었다.문제가 된 완벽함어두운 방에서 올린 스위치에 천장 조명이 한 번에 강하게 켜지면 우리는 눈살을 찌푸린다. 칼로 자른 듯 선명한 어둠과 빛의 날카로운 경계는 시각을 넘어 촉각마저 자극한다. 조명을 끌 때도 마찬가지다. 침실에서 잠자리에 들기 전 스위치를 내리면 탁 소리와 함께 공간은 찰나의 기다림 없이 한 번에 완전한 어둠으로 단절된다. 지연 없는 빛의 변화는 밝음으로나 어둠으로나 우리의 몸이 적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그러나 인간의 눈은 빛의 변화에 적응하는 데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홍채가 조리개처럼 수축하고, 망막의 시각세포가 새로
이십 대 초반이었던 20년 전, 처음 루브르에 갔다. 디자인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떠난 유럽 여행이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예술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모나리자는 생각보다 작다는 생각이 들었고, 밀로의 비너스는 입시 때 그리던 석고상을 떠올리게 했다. 대부분의 유명 작품들은 책으로 보던 것과 비슷했다. 그 거대한 공간을 다소 의무적으로 걷던 중, 이름도 모르던 어떤 조각상 앞에서 멈춰서게 됐다.‘마치 조각상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수사는 익히 들어왔지만, 그 말을 실감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조각상은 안토니오 카노바의 <에로스와 프시케>였다. 아름다운 조형을 넘어선, 실제로 보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어떤 신비로움이 느껴졌다. 당시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그 신비로움의 이유를, 빛을 설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나서 한참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예술이 붙잡으려 했던 '생기'의 정체카노바는 까라라 대리석이 가진 투명함을 알고 있었다. 그 새하얀 대리석은 보통의 돌과 달리 빛을 표면에서 완전히 튕겨내지 않는다. 이 투명함은 빛의 일부를 머금었다가 다시 내보내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옅게 빛나는 듯한 모습을 만든다. 특히 얇게 가공하면 빛이 투과하기까지 하는데, 따로 세공해 붙여야 할 만큼 얇게 만들어진 에로스의 날개에는 건너편의 창에서 들어온 빛이 은은하게 어린다. 살아 있는 피부가 빛을 마주할 때 일어나는 일과 비슷한 일이 조각 위에서 재현된다. 그래서 우리는 차가운 조각상에서 따뜻한 생기를 느끼게 된다.작품에 생기를 담으려는 이 같은 분투는 카노바와 같은 조각가만의 것이 아니었다. 유화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화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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