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6일 오후 7시. 무신사의 연중 최대 할인 행사 ‘무진장 겨울 블랙프라이데이’가 시작되자 주문이 쏟아졌다. 90분 만에 판매액이 100억원을 넘어섰다. 열흘 동안 온라인에서 팔린 상품은 719만 개, 3685억원어치다. 시간당 15억원어치가 팔려나갔다.
무신사 메가스토어 서울 용산점. /문경덕 기자
이 광란의 세일에 붙은 이름은 ‘무진장’. 2001년 서울 갈현동 반지하 빌라에 살던 고등학생 조만호 군이 개설한 프리챌 동호회 이름에서 시작됐다. 무신사는 ‘무진장 신발 사진이 많은 곳’의 약자다. 나이키 운동화 사진과 한정판 정보를 모아 다른 마니아와 공유하는 공간이었다. 25년 뒤 ‘신발에 미친’ 고등학생은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몸값 10조원으로 언급되는 기업을 이끄는 수장이 됐다. 24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무신사의 올해 거래액은 6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오늘날 무신사를 이끄는 엔진은 과거 미운 오리 취급을 받은 1만3000개(7월 기준 입점사) 디자이너 패션 브랜드다. 전체 거래액 중 ‘K패션의 허리’로 불리는 중소 브랜드(연 매출 10억~100억원)가 차지하는 비중이 45.47%에 이른다. 2015년 329억원이던 무신사 매출은 지난해 1조4679억원으로 불어났다.
2000년대 초·중반 패션 잡지들이 해외 럭셔리 브랜드와 유명 디자이너 관련 내용을 실을 때 조 대표는 홍대와 압구정 거리에 나가 ‘보통 사람’을 찍었다. 그렇게 기존 유통사가 제공하지 않던 스트리트 코디 사진과 생생한 이용자 후기, 실시간 판매 랭킹을 올렸다. 아무도 인터뷰해주지 않던 국내 신생 패션 브랜드들이 무신사에 입점했다. 한 디자이너 브랜드 대표는 “그때 무신사엔 당장 내일 거리에 입고 나갈 수 있는 ‘진짜 코디’가 있었다”고 했다.
이전까지 패션업계에선 백화점 바이어와 패션 대기업이 어떤 브랜드를 앞에 세울지 결정했다. 무신사는 그 권한을 소비자에게 넘겼다. 클릭 수와 커뮤니티를 통해서다. 이름 없는 브랜드가 랭킹 상단에 올랐고, 매대와 자본이 없던 업체가 대형 브랜드로 성장했다. 조 대표는 “무신사가 2조원 가치로 첫 투자를 확정했을 때보다 입점 브랜드가 수천억원 가치를 인정받았을 때 더 기뻤다”고 말했다.
무신사는 입점 수수료를 높이는 대신 브랜드 80여 곳의 지분을 1000억원어치 넘게 사들였다. 백화점 입점에 집착하지 않고 성수동 땅을 연달아 매입해 ‘K패션타운’으로 꾸몄다. 이렇게 체급을 키운 무신사는 이제 해외 시장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오프라인 매장을 연 뒤 4개월 만에 네 곳으로 늘렸다.
신발에 미친 그들은 어떻게 6조 패션왕국 일궜나 乙들의 반란으로 세운 무신사
무신사가 패션 플랫폼으로 체급을 서서히 키우던 2015년. 조만호 대표는 입점 브랜드가 겨울용 상품을 미리 준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브랜드 대표가 사재를 털어도 생산 자금이 부족했다. 조 대표는 돈을 무이자로 빌려주기로 결정했다. 그는 “당시 무신사는 쌓아둔 영업이익이 적고 외부 투자도 받지 않은 작은 회사였다. 자금 지원은 큰 결단이었고, 모험이었다”(2021년 임직원 메일)고 회상했다.
◇5200억원의 무이자 실험
24일 무신사에 따르면 2015년 이후 회사 파트너 펀드를 통해 집행한 브랜드 누적 자금 지원액은 5200억원을 넘어섰다. 지원한 브랜드만 1260곳. 이 생산 자금은 브랜드 성장의 생명줄이었다. 무신사 관계자는 “몇몇 인기 브랜드에만 기댈 게 아니라 허리 역할을 하는 중소 브랜드를 키워야 회사도 같이 산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무신사는 2001년 운동화 전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시작했다. e커머스 플랫폼인 무신사 스토어를 연 시기는 창업한 지 한참 뒤인 2009년이다. 브랜드 입점 방식으로 시스템을 확 바꾼 2012년이 성장사의 변곡점이 됐다. 개성 넘치는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가 물밀듯 들어왔다. 당시 한국에서는 소규모 패션 브랜드가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디자이너가 직접 브랜드를 만드는 것보다 패션 대기업에 임원으로 합류하는 것이 성공의 척도인 시절이다.
무신사는 브랜드 화보를 찍어주고 사무실을 제공했다. 브랜드가 한곳에 모이자 이용자도 저절로 따라붙었다. 커버낫, 쿠어, 디스이즈네버댓 등 수많은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가 무신사 생태계에서 몸집을 키웠다. 한 인디 패션 브랜드 대표는 “입점 초기에 매출이 잘 나지 않더라도 무신사 입점 자체가 시장에 데뷔했다는 시그널로 여겨진다”고 했다.
무신사는 이후 유망 브랜드에 지분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2018년 설립한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무신사 파트너스는 80여 개 브랜드에 1000억원을 투자했다. 브랜드가 성공하면 무신사도 같이 돈을 버는 구조다. 2021년 피스피스스튜디오에 10억원을 투자한 뒤 2년 만에 95억원을 회수한 게 대표적이다. 한 벤처캐피털(VC) 심사역은 “2018년 당시 패션은 일부 엔젤 투자를 제외하고는 벤처투자의 불모지였다. 개별 브랜드를 발굴해 초기부터 전문적으로 투자한 곳은 무신사 파트너스가 거의 유일했다”고 했다.
◇“브랜드 살아야 플랫폼도 산다”
2024년 12월, 무신사에 뼈아픈 고지서가 날아들었다. 입점 브랜드 라퍼지스토어의 패딩 충전재 표기(솜털 80%)가 잘못돼 실제 솜털 비중이 3%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커머스 플랫폼의 근간인 신뢰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는 위기였다. 무신사는 사과문 한 장으로 사태를 덮지 않았다. 업계 처음으로 ‘전수조사’라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약 100일에 걸쳐 덕다운과 캐시미어가 들어간 7968개 상품 전체의 혼용률을 검증했다. 플랫폼이 입점 상품의 품질까지 책임지겠다는 선언이었다. 물류 경쟁력이 압도적인 쿠팡과 막강한 트래픽을 앞세운 네이버쇼핑보다 무신사의 팬덤이 탄탄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백화점 입점 심사에 목매던 중소 디자이너 브랜드가 최근엔 백화점에서 러브콜을 먼저 받는다. 무신사에서 검증된 브랜드가 2030세대를 오프라인으로 모으는 핵심 콘텐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유통 권력의 지형을 뒤집은 K패션의 킹메이커’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무신사의 진짜 경쟁력은 단순히 옷을 잘 파는 것이 아니라 K패션 브랜드를 키우는 생태계 자체를 구축했다는 데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