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파리에서 고속열차(TGV)에 몸을 싣고 남쪽으로 3시간 남짓. 창밖으로 빛바랜 상아색 성벽이 모습을 드러내면 ‘교황의 도시’로 불리는 아비뇽(Avignon)에 도착한 것이다. 이 곳은 1309년부터 약 70년간 프랑스 국왕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교황 7명이 로마를 떠나 아비뇽에 머물게 된 ‘아비뇽 유수’의 역사적 현장이다. ‘교황의 와인’을 담궈온 세계적인 와인 산지 ‘샤토네프 뒤 파프’(교황의 새로운 성)와 인접한 곳이기도 하다.
지난 13일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구자하 연출의 '하리보 김치'가 끝나고 관객들이 한국 음식을 맛보고 있다./사진=허세민 기자○아비뇽 중심에 선 K공연
아비뇽 페스티벌은 ‘공연예술의 대중화’를 기치로 1947년 연출가이자 배우인 장 빌라르가 창립한 세계적인 축제다. 파리의 엘리트층이 독점하던 예술을 대중의 품으로 돌려주고자 했던 그는 아비뇽 교황청 명예의 뜰과 수도원 등 도시 전역의 열린 공간을 무대로 변모시켰다.
올해 80주년을 맞은 축제(7월 4~25일)는 시작 전부터 우려가 많았다. 프랑스 전역을 덮친 기록적인 폭염 탓이었다. 축제가 한창이던 지난 14일에는 한 서커스 공연 도중 노년 관객이 열사병으로 쓰러져 구급차가 출동하는 일도 발생했다.
이토록 뜨거운 아비뇽의 여름은 한국(꼬레·Corée)에서 온 공연들로 인해 한층 더 열기를 띠었다. 축제 측이 창립 80주년을 맞아 한국어를 올해의 초청언어로 선정하면서다. 초청언어는 특정 언어의 공연예술을 집중 조명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까지 영어, 스페인어, 아랍어가 초청됐다. 올해 페스티벌 공식 초청작(IN) 47편 가운데 9편이 한국 작품이었다.
아비뇽 거리 곳곳에 세워진 한국어 입간판. 사진=예술경영지원센터.
아비뇽 페스티벌의 티아고 호드리게스 예술감독은 K팝 등 한류에 가려져 있는 한국 공연예술의 저력에 주목했다. “오늘날 K팝, K드라마, K영화는 물론 K문학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커졌지만, 동시대 한국 공연예술에 대해선 많이 알지 못했다는 점을 깨닫고 호기심을 갖게 됐습니다. 프랑스 관객들이 자국 공연에서는 느끼지 못한 신선한 감동과 충격을 받고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아비뇽에 초대된 한국 아티스트들은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으로 무대에 선 소리꾼 이자람은 “쟁쟁한 유럽 예술가들이 공연하는 이곳에 동양인이 초대받을 일은 없을 줄 알았다”며 “욕심조차 없었는데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덕에 이번 축제에 참여할 수 있었다”고 웃었다.
○객석 가득 채운 추임새 떼창
“Très bien!(트레비앙·훌륭해요), She is extraordinary!(그녀는 경이로워요)”
지난 17일 아비뇽 중심부 오흘로쥬 광장에 위치한 오페라 극장. 이날 공연장에서 만난 크리스틴 시오라(70)는 기자가 “한국에서 왔다”고 밝히자마자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초청한 한국 공연 중 마지막 순서,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이 막을 내린 직후였다.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주인과 하인>을 판소리로 풀어낸 이 작품은 탐욕스러운 주인 ‘바실리’와 충직한 하인 ‘니키타’가 러시아 설원 한가운데서 길을 잃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파리에서 온 시오라는 돋보기 안경 너머로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기자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이자람은 왜 소설을 바탕으로 판소리를 만드나요?”, “그녀의 다른 공연은 또 어디서 볼 수 있죠?”, “북을 치는 사람(고수)도 한국에서 유명한가요?” 처음 접한 판소리의 매력에 깊게 빠진 그는 한동안 가족들과 공연 후기를 나눈 후에야 발걸음을 옮겼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창작 판소리 '눈, 눈, 눈'을 선보인 소리꾼 이자람./사진=아비뇽 페스티벌
외국인 관객이 판소리를 온전히 즐길 수 있을까? 공연 전 걱정은 그야말로 기우였다. 작품의 흡입력은 국경을 초월했다. 이자람은 과거 에어비앤비에서 만난 프랑스 집주인과의 인연으로 원작 <주인과 하인>을 접할 수 있었다는 비하인드를 소개하며 관객과의 심리적 거리를 단숨에 좁혔다. 바실리의 말 ‘제티’가 귀를 움직이고 당근을 씹는 모습을 손짓과 표정, 부채 등으로 실감나게 표현할 땐 객석 곳곳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파리에서 온 바이올렛 브루노는 “이자람의 표현력이 너무 좋아서 나중엔 자막을 볼 필요 없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현지 관객들은 공연 내내 이자람에게 아낌 없는 호응을 보냈다. 이자람이 “부채를 펼치면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내달라”고 요청하자 관객들은 바람 소리로 화음을 만들어냈다. 괜한 부끄러움에 추임새를 아끼는 한국 관객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객석 앞자리를 채운 백발의 관객부터 부모 손을 잡고 온 꼬마 관객까지 나이와 성별, 국적에 관계없이 판소리로 모두가 하나가 된 순간이었다.
○별빛 아래 울려 퍼진 한국어
15일(현지시간) 밤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명예의 뜰에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 연출가의 낭독공연 '새'가 초연됐다. 공연 시작 전 약 20900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연합뉴스.
이날 공연만이 아니었다. 한국 고유의 역사와 창의성을 결합한 한국 작품들은 예술을 사랑하는 현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호드리게스 감독은 “어떤 관객 그룹은 한국 초청공연을 전부 찾아 다니며 한국 문화로의 깊은 여행을 즐겼다”며 “이러한 뜨거운 반응 덕에 몇몇 한국 작품은 벌써 다른 유럽 페스티벌에 초청됐다”고 전했다.
지난 15~16일 이틀간 교황청 명예의 뜰에서 열린 낭독극 ‘새’는 이번 축제의 하이라이트였다. 아비뇽 페스티벌을 대표하는 이 곳은 교황청 석벽이 무대가 되고, 쏟아지는 밤하늘 별이 조명이 되는 성스럽고도 낭만적인 공간이다. 영화 ‘파과’, 연극 ‘헤다 가블러’ 등에서 열연한 배우 이혜영과 프랑스 대표 배우 이자벨 위페르는 이 곳에서 한강 작가의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1부를 낭독했다.
소설가 한강(가운데)과 배우 이혜영(왼쪽), 이자벨 위페르가 15일(현지시간)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에서 열린 낭독공연을 마치고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 배우는 각각 소설 속 주인공 ‘인선’과 ‘경하’를 자신의 모국어로 번갈아 읽어내려갔다. 교황청 무대는 이들이 발화하는 대로 폭설에 휩싸인 제주도가 되기도, 손가락이 다친 인선이 입원한 병원이 되기도 했다. 공연 말미, 흰 원피스를 입은 한강 작가가 무대 위로 걸어나와 소설의 배경이 된 제주 4·3사건의 참상을 전하자 2000여명의 관객을 채운 야외 공연장은 순식간에 한겨울 시린 정적 속으로 빠져들었다.
한국 문학의 깊이에 매료된 해외 연출가의 작품도 만나볼 수 있었다. 앞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무대화한 이탈리아 연출 다리아 데플로리안의 신작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가’다. 이 작품 역시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가 원작이다. 데플로리안은 연출과 함께 경하 역을 직접 연기했다. 그는 “한강 작가는 지극히 사적인 폭력과 국가 차원의 거대한 폭력을 뚜렷하게 구분 짓지 않고 두 가지 층위를 끊임없이 뒤섞어낸다”며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서사적 능력과 특유의 시적 표현력이 탁월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축제 본부가 운영하는 아비뇽 서점에선 프랑스어로 번역된 한강 소설과 시선집이 판매됐다. 이외에도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천명관의 <고래> 등 한국 대표 작가의 작품이 서가를 가득 채워 현지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교황청 빛낸 K아트
축제 기간 이우환 작가의 전시 ‘렐라툼’(Relatum)은 교황청 내부를 장식했다. 700년 역사의 교황청 내부를 한국 예술가의 작품이 채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특히 대예배당 바닥을 가득 채운 60톤가량의 석판은 압도적 공간감과 함께 시간이 멈춘 듯한 전율감을 선사했다. 아비뇽 인근 아를에서 온 르네는 “교황청이 만들어졌을 때처럼 석판을 하나씩 옮긴 작가의 작업 과정이 흥미롭게 소개됐다”며 “교황청의 웅장한 공간과 작품의 고요한 분위기가 잘 어우러지는 것 같다”고 했다.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오는 11월 15일까지 이어진다.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에서 열리고 있는 이우환 작가의 전시. 작품명 'Response'./사진=허세민 기자
한국 영화도 연달아 상연됐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 등이 현지 관객을 만났다. 구자하 연출의 ‘하리보 김치’를 보러 온 한 이탈리아 관객은 “봉준호와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며 “영화 프로덕션 관련 일을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를 접했고, 이제는 한국 문화 전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