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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아직도 생생…19조 잭팟에도 구미 주민들 못 웃는 까닭 [소멸 리포트]
삼성·LG 잇단 투자 발표에도 들뜨지 않는 구미
2003년 대규모 투자 놓친 뒤 산업 생태계 약화
실무 협의는 이제 시작…치밀한 후속준비 관건
2003년 대규모 투자 놓친 뒤 산업 생태계 약화
실무 협의는 이제 시작…치밀한 후속준비 관건
'신뢰의 삼성! 로봇·AI 분야 19조원 투자! 구미가 세계 최고로 보답하겠습니다.'
현수막만 보면 경북 구미시는 축제 분위기입니다. 삼성의 19조원 투자 계획을 환영하는 문구가 시청 앞부터 아파트 단지와 상가 거리까지 시내 곳곳을 뒤덮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시민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습니다. 20여년 전 대기업 투자를 놓친 뒤 도시 전체가 내리막을 걸었던 기억 탓에, 장밋빛 약속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정부는 지난 3일 구미를 로봇과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중심의 '제조 AX 혁신 거점'으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내놨습니다. 삼성전자와 삼성SDS는 휴머노이드 로봇 양산 라인과 AI 데이터센터 구축 등에 총 19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고, LG그룹도 광학솔루션과 첨단 기판·디스플레이 생산시설 확대 계획을 내놨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실제로 들어와 봐야 안다"며 기대보다 경계심을 먼저 드러냈습니다.
◇ "투자한다 해놓고 안 한 적 많잖아요"
이곳에서 보세의류점을 운영하는 A씨는 "여기가 구미 최고 중심가인데 경기가 없다 보니 상가가 많이 비었다"며 "4~5년 전부터 큰 건물들도 버티지 못하고 점포들이 다 빠져나갔다. 요즘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삼성의 투자 계획에 관해 묻자 "좋아지는 곳도 있겠지만, 실제 투자가 들어와 봐야 알 것 같다"며 말을 아꼈습니다.
손님 없어 힘들다는 택시 기사 B씨의 반응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투자한다고 해놓고 실제로 하지 않은 일이 많지 않으냐"며 "용수나 전력 같은 산업 인프라를 따지면 기업들이 구미로 들어오는 게 맞다고 본다. 하지만 처음에는 떠들썩하게 발표하지만 몇 년 지나면 유야무야되고, 언제 그런 얘기가 있었느냐는 식이 된다"고 했습니다.
◇ 20년 악몽 같은 기억…"그땐 구미가 배불렀다"
당시 구미에서는 LG필립스LCD의 1~6세대 생산라인이 가동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00만평 부지에 100억달러 규모로 추진된 차세대 투자지는 파주로 결정됐습니다. LG전자 안양연구소와의 연구개발 연계, 수출 물류 여건에 더해 경기도의 신속한 입주 지원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주행의 여파는 공장 몇 곳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7세대 이상 신규 라인이 파주에 집중되면서 협력업체와 연구개발 조직, 장비·소재 기업도 수도권으로 이동했습니다. 휴대전화 생산기지의 해외·평택 이전까지 겹치며 구미 산단의 빈 공장이 늘었고, 지역 상권도 함께 위축됐습니다.
구미산단에서 반세기를 살았다는 공인중개사 C씨는 "LG가 구미를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가 LG의 본산 같은 곳이라 계열사와 2·3차 벤더까지 생태계가 다 갖춰져 있었다"며 "4·5공단을 조성할 때 부지를 파격적으로 지원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는데 당시 시와 도가 '배짱'을 부렸고, 그 사이 경기도지사가 적극적으로 당겨간 것"이라고 회상했습니다.
시민 D씨도 "다른 도시는 서로 유치하려고 난린데, 그때만 해도 구미가 배가 불렀었다. 전국에서 최고로 잘 나가는 도시였으니까"라며 "인동 같은 데는 삼성·LG 직원들로 꽉 차서 방이 없을 정도였다"고 언급했습니다.
◇ "2000억 투자해도 고용 100명"
한 구미시의회 관계자도 "아직 투자 '계획' 단계"라고 전제하면서 "옛날에는 노동집약적 제조 중심이라 (고용 효과가) 컸지만 지금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2000억원을 투자해도 고용이 100명 조금 넘지 않느냐"고 의구심을 보였습니다.
◇ 구미시는 총력전…"실무 협의는 조율 중"
반도체 분야에서는 소재·부품 기업과 팹 유치를 추진합니다. 방위산업은 한화시스템과 LIG넥스원 등 지역 기업과 협력을 넓히고 소부장 특화단지 지정을 정부에 건의하기로 했습니다. AI 분야에서는 삼성SDS 데이터센터를 기반으로 AX 실증 산단과 AI 집적단지 유치를 추진하고, 200만평 규모의 국가첨단전략산업단지 조성도 요청할 방침입니다.
다만 신규 투자와 관련한 구체적인 실무 협의는 아직 시작 단계입니다. 시 관계자는 "AI 데이터센터는 함께 협의해 진행하고 있고 로봇 관련 추진 현황 자료도 제공했다"면서도 "삼성에서 정식으로 요청한 것은 아직 없고 핫라인 구축을 논의하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구미시의 도시브랜드는 'YES GUMI'입니다. 'YES'에는 시민을 뜻하는 'Your', 신나는 도시를 뜻하는 'Exciting', 스마트 혁신을 뜻하는 'Smart'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투자 발표를 반기는 "YES"가 수사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20년 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번에는 기업의 요구를 앞서 읽고 산업 기반과 인재, 정주 여건까지 제대로 준비해야 합니다. 구미의 "YES"가 단순히 환영의 말이 아니라 달라진 준비로 증명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