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의 한 수'로 카타고 꺾어
고재연 사회부 기자
쎈수학·한경 기신전(棋神戰) 제2국이 열린 지난 19일 해설실에서 대국을 지켜보던 권주리 3단은 양재호 한국기원 사무총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 ‘알파고 쇼크’를 경험한 바둑계는 인공지능(AI)을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숙이 받아들인 분야다. 이제 해설자들은 자신의 감각 대신 AI가 제시하는 ‘블루스팟’(최적의 착점)과 실시간 승률 그래프를 보며 중계한다. 최정상급 기사들도 AI가 내놓는 ‘정답지’를 연구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누군가는 인간 바둑이 상향 평준화됐다고 했고, 누군가는 기사 고유의 기풍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조훈현 9단은 한 인터뷰에서 “AI가 가르쳐주는 수는 뻔하고, 특히 초반엔 비슷한 모양밖에 안 나온다”며 “바둑이 재미없어졌다”고 평가했다.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 해설실에 있던 프로 기사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바둑의 신’ 경지에 올라선 AI와의 대국에서 “전투로 풀어가는 건 거칠게 말하면 자살 행위”라던 신진서 9단이 160수로 상대 돌을 과감하게 절단하며 공격에 나서면서다. 변수가 복잡해지면서 AI의 형세 판단에서 신 9단의 승률은 떨어졌다. 이후 AI의 엄청난 연산 능력에 맞선 초인적인 수읽기가 이어졌다. 대국 후 인터뷰에서 신 9단이 “중반 들어 숨도 못 쉬고 하도 맞아서 또 지겠다 싶었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이 선택은 알파고 이후 10년 만에 AI를 상대로 거둔 의미 있는 승리로 이어졌다.
프로 기사들은 이 순간을 이번 대국의 ‘하이라이트’로 꼽는다. 김지석 9단은 “2017년 알파고 제로가 나온 뒤 인간 기사는 두 점을 놓고도 AI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이 굳어졌다”며 “지금 그런 기사가 등장했다는 것은 결국 인간 기사의 역량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인간 기사들은 AI가 남긴 수백만 개의 기보를 연구하며 수읽기의 깊이를 키웠지만 여전히 변수가 많은 중반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신 9단은 중반에 AI와의 전투 바둑을 감수하며 자신만의 수로 결행에 나섰다.
이세돌 9단은 알파고 쇼크 이후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며 이른 은퇴를 선언했다. ‘신공지능’으로 불리는 세계랭킹 1위 신 9단도 지난해 인터뷰에서 “AI가 실력으로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기 때문에 프로로서 자존감을 잃을 때도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이번 대국에서 그는 ‘인간의 한 수’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인간 대표’로 나선 신 9단을 향한 응원의 열기는 뜨거웠다. 이 관심이 AI와의 공존을 모색하며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바둑계에 힘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