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휑한 빅사이즈 매장 >   11일 서울 이태원의 한 빅사이즈 전문 매장. 손님이 거의 없어 한산한 매장 앞에서 주인이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소이 기자
< 휑한 빅사이즈 매장 > 11일 서울 이태원의 한 빅사이즈 전문 매장. 손님이 거의 없어 한산한 매장 앞에서 주인이 휴대폰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소이 기자
‘8㎏을 뺐는데 10년은 늙어 보이는 이유.’ 최근 서울 강남의 한 피부과에서 올린 영상 제목이다. 위고비, 마운자로 등 비만치료제로 살을 뺀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새로운 고민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살이 빠지면서 볼이 꺼지고 팔자주름이 깊어지며 턱선이 처지는 이른바 ‘마운자로 페이스’ 현상이다. 최근 피부과는 마운자로 페이스 환자를 유치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영업 중이다. 한 피부과 상담실장은 “다이어트 후 얼굴 처짐을 고민하며 리프팅 상담을 문의하는 환자가 늘고 있다”고 했다.

◇백화점서 고가 의류 ‘불티’

"8㎏ 뺐는데 10년 더 늙어보여"…뜻밖의 특수 누리는 곳이
비만치료제가 국내에 빠르게 보급되면서 미용, 패션, 식품 등 각종 소비 영역에서 파급효과가 커지고 있다. 패션시장에서는 큰 사이즈 옷 수요가 급감하고 있다. 살 빠진 사람이 헌 옷을 못 입게 돼 작은 옷을 새로 사고 큰 옷은 더 이상 찾지 않기 때문이다.

11일 중고거래 플랫폼 당근마켓에 따르면 올 1~5월 의류 거래는 전년 동기 대비 22% 늘었지만 ‘빅사이즈’ 키워드 검색량은 25% 줄었다. 큰 옷을 찾는 사람이 감소한 영향으로 해석된다. 반대로 살을 빼고 안 입게 된 큰 옷을 내다 파는 사람이 많아져 XL, 2XL 등 큰 사이즈 매물은 늘었다.

도매 단계부터 큰 옷 공급이 끊기고 있다.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잠옷, 속옷을 파는 한 상인은 “빅사이즈 잠옷은 도매로 나오지 않아 살 수가 없다”고 했다. 서울 이태원에서 빅사이즈 전문 매장을 운영하는 한 사장은 “예전엔 4XL, 5XL까지 갖췄는데 지금은 떼올 데가 없다”고 했다.

큰 옷이 빠진 자리는 백화점의 고가 의류가 채우고 있다. 롯데·신세계·현대 등 국내 주요 백화점에서 올 4~5월 남성복 판매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0% 안팎에 이른다. 같은 기간 여성복도 롯데가 25% 증가하는 등 크게 늘었다. 비만치료제를 통해 살을 많이 뺀 남성이 패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체형이 변화해 옷장 전체를 새로 채우려는 ‘올체인지’ 트렌드가 패션 전반의 수요 증가를 이끌고 있다”고 했다.

◇지방파괴주사 수요 급증

피부과와 성형외과도 비만치료제의 ‘약효’를 보고 있다. 꺼진 볼륨을 채우는 콜라겐 주사와 필러, 처진 살을 당기는 고강도 집속초음파(HIFU) 장비 ‘울세라’ 및 고주파 장비 ‘서마지’, 실리프팅 등이 대표적 시술로 꼽힌다. 처진 피부를 잡는 데 쓰이는 보툴리눔 톡신과 필러를 생산하는 휴젤은 지난해 매출이 4251억원으로 전년 대비 13.9% 증가했다. 비슷한 상품을 판매하는 메디톡스도 같은 기간 매출이 8.1% 불어나 2472억원에 달했다. 한 성형외과 원장은 “살을 뺀 뒤 턱밑, 팔뚝 같은 국소 부위를 정리하는 지방파괴주사(DCA) 수요가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주류 판매가 감소하는 것도 비만치료제 확산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비만치료제로 많이 쓰이는 글루카곤유사펩타이드(GLP)-1 약물은 식욕뿐 아니라 뇌의 보상 회로에 작용해 음주 욕구를 줄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이트진로는 올 1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3.6% 줄었고 영업이익은 10% 넘게 쪼그라들었다. 특히 포만감이 큰 맥주 판매량이 이 기간 12% 감소했다.

이 때문에 가뜩이나 힘든 요식업 자영업자는 더 큰 위기를 맞고 있다. 국세청에 따르면 전국에 등록된 간이주점 및 호프주점은 올 3월 기준 2만8178곳으로 전년 3월 대비 9.6%(2998곳) 줄었다. 서울 중구의 한 일본식 선술집 사장은 “요즘은 고객들이 한두 병만 마시고 일어나니 객단가가 뚝 떨어졌다”고 토로했다.

안재광/김영리/이소이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