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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기업, 거버넌스 작동 '빨간불'...기업 존립 위협

한국 기업의 형식적 거버넌스는 갖추어졌지만, 실제 작동은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계속되어 왔다. 실제 데이터 분석 결과 거버넌스 구조와 행동이 괴리된 기업 그룹이 존재했으며, 횡령과 배임 등의 문제가 심각했다. 구조와 행동의 괴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실제 행동을 가능케 하는 이사회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한경ESG] 러닝 - 데이터로 본 기업 거버넌스①

상법 개정안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가 크다. 연이어 처리된 상법 개정안이 실행되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 중 하나로 지목되어 온 기업 거버넌스가 개선될 것이라는 희망이다. 그런데 “상법 개정이 우리나라 기업의 오랜 거버넌스 관행과 행동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에스지데이터 연구팀이 한국 200대 대기업의 거버넌스를 연구한 결과 개정 상법과 관련한 항목의 형식적 충족과 실제 거버넌스 사이에 갭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외형을 갖춘다고 내실이 저절로 갖춰지지는 않는다.

형식적 기업 거버넌스 틀과 행동 사이의 구조적 격차

점수는 두 가지로 설정됐다. 먼저 구조적 격차 점수(Structure Gap Score, SGS)는 개정 상법의 수준과 실제 거버넌스 수준 격차(gap)를 정량화한 점수다. 좋은 거버넌스는 개정 상법이 요구하는 수준에 가까운 것이라고 전제했다. 이 점수가 낮을수록 상법 개정안과 가까운 거버넌스 구조를 갖추었다.

측정 가능한 범위에서 상법 개정 조항인 △독립이사 1/3 의무화 △감사위원 3%룰 강화 및 분리선출 △이사 충실의무 확대 △자사주 의무소각 및 교환사채(Exchangeable Bond, EB) 차단 △집중투표제 의무화 △전자주주총회 병행 의무화 등에 대응하는 구조적 격차 항목을 선정했다. SGS는 구조적 격차 항목을 상법 조항별 가중치로 종합한 뒤 0~100점 범위로 표준화한 값이다.

중요한 것은 SGS가 ‘구조적 조건’만을 측정하도록 의도적으로 설계됐다는 것이다.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어떤 발언을 했는지, 감사위원회가 무엇을 적발했는지와 같은 ‘운영의 질’은 SGS의 측정 범위가 아니다. SGS가 구조만 보기 때문에 별도로 ‘행동’을 측정하는 거버넌스 행동 점수(GBS)와의 비교가 의미를 갖는다.

두 번째는 거버넌스 행동 점수(Governance Behavioral Score, GBS)다. 기업이 실제로 일으킨 거버넌스 사건 이력을 측정하는 지표다. 점수가 낮을수록 좋다. 2015년부터 축적해 온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사건사고 데이터베이스 중 거버넌스(G) 이슈로 분류된 11만558건의 사건 이력을 바탕으로, 기업이 실제로 일으킨 횡령·배임·분식회계·내부거래·경영권 분쟁 등 거버넌스 사건이 얼마나 일어났는지를 측정했다. 모든 사건은 전통적인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제3자가 검증 가능한 기사를 통해 수집한 것으로, 기업이 스스로 공시하거나 기업설명회(IR) 등에서 설명한 자기 서술이 아니다.



거버넌스 구조와 행동 괴리된 기업 57곳

결과는 명확했다. 거버넌스 구조는 양호하나 과거 거버넌스 행동이 미흡한 기업 그룹은 57곳(28.5%)으로 나타났다. 기업당 평균 4.8건의 거버넌스 사건이 발생했고, 그중 57.5%가 ‘기업 존립을 위협하는 수준’의 최고 심각도를 보였다.

11년간 사건 기록을 살펴보면, 이 그룹에 속한 기업의 가장 빈번한 문제는 횡령과 배임이었다. 임원이 회삿돈을 빼돌리거나 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결정을 내리는 유형으로, 전체 사건의 76%가 최고 심각도를 기록했다. 그다음은 거버넌스(지배구조) 투명성 문제(허위공시, 늑장공시, 사외이사 독립성 의심 등)였고, 리스크 관리 부실(기술 유출, 금융사고, 부실공사 등)이 뒤를 이었다.

비교적 격차가 작은 그룹과 격차가 큰 그룹을 극명하게 갈라놓은 차이는 바로 소송 노출도다. 과거의 거버넌스 실패는 결국 법적 분쟁으로 이어진다. 횡령은 형사소송으로, 내부거래는 주주대표소송의 원인으로, 경영권 분쟁은 가처분 신청으로 번진다. 아무리 서류를 잘 갖추어도 과거에 저질러 놓은 일들은 결국 소송이라는 형태로 발목을 잡는다.

이번에는 상장폐지된 기업을 살펴봤다. 2015~2025년에 상장폐지된 기업은 모두 960개다. 이들의 거버넌스 구조 격차 점수인 SGS는 62.4점으로, 200대 기업의 평균인 31.3점, 전체 상장기업(2637개)의 38.8점보다 훨씬 높다.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지분율은 59.2%로, 현재 상장기업(2637개)의 41.2%보다 18.0%p 높다. 독립이사 1/3 충족률은 50%로 13.4%p 낮았다. 상장폐지의 원인을 오로지 거버넌스 구조적 결함 때문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거버넌스 구조가 미흡할수록 기업 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투자자는 손실을 본다.

데이터 분석이 말해주는 것은 ‘제도의 존재’와 ‘제도의 작동’은 다른 문제라는 점이다. 이미 독립이사 3분의 1을 두고 있는 대기업에서 횡령이 발생하고, 사외이사 과반수를 확보한 금융지주사에서 금융사고가 1년 만에 58배 늘었으며(2025년 2월 기준), 감사위원회가 있는 기업의 전직 회장이 친인척 부당대출로 수사를 받았다. 이사회가 존재하지만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져도 안건이 그대로 통과되는 곳도 있었다. 거버넌스 구조를 갖췄는데도 행동은 왜 따로 노는가?

가장 먼저 사고가 난 뒤에 규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가장 흔한 패턴이다. 큰 횡령 사건이 터지면 감사위원회를 강화하고, 경영권 분쟁이 벌어지면 사외이사를 늘린다. 사고가 먼저, 제도가 나중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형식은 갖췄지만 과거의 흔적은 그대로 남는다. 마치 교통사고를 여러 번 낸 사람이 사후적으로 방어운전 교육을 이수한 것과 같다.

규제가 자동으로 거버넌스 구조를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금융회사들이 대표적이다. 은행법과 금융지주회사법에 의해 사외이사 과반수, 감사위원회 의무 설치 등이 이미 적용되어 있으나, 실제 거버넌스 수준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한다. 전직 은행장이 채용비리로 구속되며, 수천억 원 횡령 사건이 터지는 등 금융권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제도는 있지만 작동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사외이사가 이사회에 앉아 있지만 경영진의 결정에 고개만 끄덕인다. 감사위원회가 존재하지만 독립적 감사를 수행하지 못한다. 사외이사가 외유성 출장을 다니다 수사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 감시자가 감시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구조, 이것이 가장 위험한 유형이다.

상법 개정이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11년간의 데이터가 보여주는 결론은 명확하다. 규제 강화만으로는 기업 행태를 바꾸기 어렵다. 거버넌스를 운영하는 의지와 책임감이 핵심이다. 2025년부터 순차 시행되는 상법 개정은 한국 기업의 거버넌스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한 중요한 제도적 장치다.

상법 개정이 시행되면 구조적 격차가 얼마나 개선될까. 한 가지 예로 ‘독립이사 1/3 의무화’가 완전히 시행되는 것을 전제로 이에스지데이터가 시뮬레이션해 보니 전체 상장사의 SGS 평균은 50.33점에서 36.01점으로, 약 28.5% 개선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법 개정안 중 단일 조항으로는 가장 큰 직접 효과다. 문제는 법조문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사회 문화와 경영진 견제, 내부통제의 실질적 작동되는 행동이 수반될 것이냐 하는 것이다.

구조와 행동의 괴리를 좁히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세 가지 보완 과제를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사외이사 활동 내역(이사회 안건별 발언·찬반) 공시를 의무화하여 ‘앉아 있는 사외이사’와 ‘일하는 사외이사’를 구분해야 한다. 둘째, 이사회 내 소수의견과 반대표 행사 내역을 표준 양식으로 공시해 거버넌스가 작동한다는 것을 시장이 검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내부고발자 보호의 실효성을 높여 사건이 사후 적발이 아니라 사전 차단으로 전환되도록 해야 한다.

경영진에 대한 견제 기능, 투명한 부정 보고 시스템, 소수주주 보호 구조가 실무에서 기능해야 한다. 구조를 갖추는 데서 그치지 않고, 구조와 행동이 일치하는 문화가 작동할 때 완성된다. 거버넌스의 본질은 행동과 문화에 있다.

정승혜 이에스지데이터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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