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당시 마흔 살인 스코틀랜드의 케네스 그레이엄은 발명가의 딸인 엘스페스 톰슨과 결혼했고 이듬해 외동아들 알라스테어를 보았다. 미숙아로 태어나 한쪽 눈이 실명되고 건강이 나쁜 아들을 위해 그레이엄은 이야기를 지어내 잠자리에서 들려주었다. 네 살 때부터 시작된 이야기는 두꺼비가 주인공이었고 곧 물쥐와 두더지, 오소리가 합류했다.
아들이 자라며 편지로도 전해주기 시작한 이야기는 그레이엄이 1908년 은퇴하면서 책의 원고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그가 잉글랜드 은행에서 은퇴한 뒤 가족과 함께 버크셔 블루버리의 오래된 농가로 이사해 작업한 이야기가 바로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이다. 어린이를 무지몽매한 존재로 폄하한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탓에 상상력을 자극하는 ‘버드나무’의 출간은 쉽지 않았다.
아이들이 몽상에 빠지는 걸 막고 획일적인 교육을 강조하는 현실이 녹록지 않았지만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은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자국인 영국에서도 인기가 엄청났지만,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도 반향이 대단했다. 특히 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사랑받았으니, 그는 그레이엄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읽고 또 읽다 보니 등장하는 동물들을 오랜 친구처럼 여기게 되었소’라는 내용이었다.
잉가 무어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삽화. / 필자 제공
자동차와 마차가 공존하는 20세기 초의 영국, 땅속에서 혼자 사는 두더지는 봄맞이 대청소를 하다가 내팽개치고는 세상으로 뛰쳐나온다. 그리고 강가에서 배를 타고 시도 읊는 물쥐와 친구가 된다. 땅속 세상만이 전부라고 여기고 살아온 두더지는 강도 신기하고 배 타기도 즐겁기만 하다. 물쥐와 친교를 쌓는 사이 두더지는 천연림 한가운데 사는 현명한 조언자 오소리 아저씨와도 친해진다.
그리고 이들 셋에 두꺼비가 가세한다.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아 강 마을 최고 부자인 두꺼비는 새로운 것만 보면 미친 듯이 몰두하는데, 이런저런 탈것들을 탐닉하다가 결국 자동차에 마음을 홀딱 빼앗기고 만다. 부자니까 직접 사서 타면 될 것을, 남의 자동차를 허락도 없이 갈취해 난폭 운전을 하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힌다.
곡절 끝에 두꺼비는 결국 탈옥에 성공하지만 이미 그의 저택은 족제비와 담비 무리에게 무단으로 점거된 상황이었다. 이에 두더지와 물쥐, 오소리가 힘을 합쳐 이들을 일망타진하고 두꺼비의 저택을 되찾아준다. 사건을 계기로 두꺼비는 철이 들면서 잘난 척하는 사고뭉치에서 의젓한 친구로 거듭났고 네 동물의 명성이 천연림에 퍼져나간다.
사색적이고 시적인 문체와 빛나는 상상력으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사랑받아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는 <곰돌이 푸>(A. A. 밀튼)부터 <해리 포터>(J.K. 롤링)를 비롯 무수히 많은 아동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는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의 7장 제목인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을 1967년 데뷔 앨범의 제목으로 차용했다.
핑크 플로이드가 '버드나무' 7장 제목에서 차용한 앨범 ‘The Piper At The Gates of Dawn'. / 사진 출처. Discogs
원작은 글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워낙 유명한 고전인지라 출간 4년 뒤인 1913년부터 그림책으로도 출간되기 시작했다. 백년도 넘는 세월 동안 오십 명 이상의 삽화가들이 자신만의 화풍으로 재창조한 가운데, 오늘 소개할 삽화는 잉가 무어의 작품이다. 2000년 출간돼 전 세계적으로 백만 부 이상 팔린 그의 삽화 버전에서는 작품의 끝에서 벌어지는 네 동물의 만찬 장면이 가장 두드러진다.
족제비와 담비 무리로부터 저택을 되찾은 뒤 축하를 위해 벌어진 만찬에서 무엇보다 칠면조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 칠면조는 미국 추수감사절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다만 영국은 크리스마스에 칠면조를 먹는데 역사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헨리 8세가 유행시키기 시작해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의 출간 시기였던 빅토리아 시대를 거쳐 세계 2차대전 이후 가격이 내려가고 흔해지면서 입지를 확실히 다졌다.
오늘날 크리스마스 하루에만 천만 마리가 소비될 정도로 칠면조는 영국의 크리스마스 전통 음식인데, 솔직히 상징성만큼 맛있지는 않다. 단백질이 100그램당 30그램에 이를 정도로 풍성하지만, 지방은 2.4그램 수준이니 어떻게 익혀도 퍽퍽함을 피할 수 없다. 소금과 설탕물에 담가 삼투압으로 수분을 보충하는 염지부터 잘못하면 큰 화재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튀김까지 온갖 조리법이 있긴 하지만 어떤 것도 칠면조의 태생적인 퍽퍽함을 상쇄해줄 수 없다. 너무나도 안타깝지만, 칠면조의 팔자인 것을 어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