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 거실 책장에는 똑같은 키에 딱딱한 양장 표지. 여기에 금박으로 나란히 이름이 적힌 전집이 있었다. <한국대표작가 소설 전집> 소파에 앉아 팔만 뻗으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히는 그 책들을 결혼하고 집을 떠날 때까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지금 그 책이 내 책장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시절 전집을 읽지는 않았지만, 우리 집 거실 풍경을 꽤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기억하는 데 상당히 지분이 있음은 틀림없다.
사진. ⓒ소심이
사진. ⓒ소심이
표지만 보고도 그 ‘이쁨’에 반해 플렉스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최근 내 책장을 화려하게(?) 장식해 준 주인공은 ‘녹색광선’. 외계인의 눈에서 나올법한 신비로운 느낌이다. 그들이 만드는 책을 보는 순간 홀리 듯 장바구니에 책을 넣게 되는 매력과 낯선 반가움을 생각하면 찰떡 같은 이름이다. 출판사 ‘녹색광선’은 무국적성(無國籍性, 어느 나라의 국적도 가지지 않은 성질)을 추구하며,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가의 작품 중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을 출판하는 콘셉트로 책을 만든다. 누구나 아는 작가의 덜 알려진 작품이라는 것 또한 어찌나 매력적인지……
(왼쪽부터) 알베르 카뮈 <계엄령>,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오노레 드 발자크 <미지의 걸작> (녹색광선 출판) / 사진. ⓒ소심이
(왼쪽부터) 알베르 카뮈 <계엄령>,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키니아의 작은 말들>, 오노레 드 발자크 <미지의 걸작> (녹색광선 출판) / 사진. ⓒ소심이
출판사 ‘녹색광선’을 이끌고 있는 박소정 대표는 영화 ‘녹색광선(에릭 로메르 감독)’에서 두 주인공이 대기의 상태, 습도 등 모든 조건이 맞아야만 관측할 수 있는 특별한 녹색광선을 함께 보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책을 좋아하는 사람 역시 녹색광선 같은 특별한 책을 찾아다닌다는 생각으로 출판사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녹색광선의 책들이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이 고전에 주목했다는 것. 고전 소설은 저작권에서 자유로운 책들이 많고, 오랜 시간을 통해 독자들에게 이미 작품성과 대중성을 검증받은 만큼 사랑 받을 수 있는 조건을 이미 갖추고 있다. 여기에 출판사만의 심플하면서도 직관적이고 무엇보다 예쁜 책 디자인은 녹생광선의 추구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예쁜 책이다.

예쁜 책 이야기에 북디자이너 ‘함지은’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의 북디자인이 더욱 특별한 이유는 예쁘지만 그 모든 디자인의 시작은 책의 내용에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디자인한 많은 책을 가지고 있지만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리커버 한정판을 받아보고 감동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소설책이 이렇게까지 예쁠 일인가’ 라면 미간을 찌푸렸다.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녹색광선 출판) / 사진. ⓒ소심이
움베르토 에코 <푸코의 진자> (녹색광선 출판) / 사진. ⓒ소심이
디자인 스튜디오 상록을 운영하고 있는 그녀는 오래 두고 보아도 아름다운 책을 만들겠다고 한다.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책. 나도 그렇다. 내 책장에 오래 두고 보아도 아름다운 책을 소장하고 싶다. 이제는 표지가 눈에 띄는 책을 보면 그 첫 페이지를 열어 북디자이너를 찾아보게 된다. 그녀의 힘이다.

책의 본질은 이야기이지만, ‘책’은 그 자체로 책을 만드는 사람, 읽은 사람들만의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어느 책 수선가의 기록>은 책 자체의 가치에 집중하는 에세이다. 책 수선가 배재영은 에세이를 통해 책 수선 의뢰에 대한 이야기와 그 과정을 꼼꼼하게 나열해 간다. 원본과 똑같이 복원하는 것은 물론 의뢰인의 이야기를 듣고, 완전히 새로운 책으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오래된 성경, 최애 만화책 시리즈, 결혼사진 각기 다른 스토리와 애정이 담긴 그 책들은 그녀의 손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나를 표현해 주고 대변해 주는 책. 책과 함께했던 순간, 그리고 놓치고 싶지 않은 시간에 머물게 하니, 평생을 함께하는 ‘반려책’을 만들어주는 귀한 직업이다.

책을 온전히 그 자체로 좋아하고 만드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들의 선함이 다가와 따뜻해지고 나도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

예쁜 것은 좋다.
나는 소설이 참 좋다.
예쁜 소설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소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