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디오니소스의 시간’을 시나위 정신의 새로운 실천적 갱신 안에서 음악화하고 감각화하고자 하는 하나의 제의가 있다. 설명이 필요 없는 독보적인 한국 음악가 원일이 창조해낸 <디오니소스 로봇>은 2022년 통영국제음악제의 위촉을 받아 처음 세상에 나왔고 2023년에 새로운 버전으로 LG아트센터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공연된 바 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더욱 음악적 제의로 집중된 형태로 다시 태어난 이 작품이 2025년 11월, 프랑스 몽펠리에와 영국 런던에서 유럽 관객들의 환호 속에 공연을 마쳤다.
시나위는 본래 무악(巫樂)에서 기인하는 음악의 형식이다. 그 때문에 종교와는 완전히 분리되어 세속화/근대화가 완결된 듯 보이는 동시대의 음악 세계 안에서 시나위의 이러한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태생은 일견 현대사회의 예술과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음악이 일상 속 선형적 시간 안에 다층적 시간들의 균열을 냄으로써 생의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이면들을 들려주는 역할과 효과를 지닌다는 점에서, 음악 그 자체는 우리 일상 밖 종교 체험을 대체하는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일상 안에서 그러한 근본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이질적이며 현재적인 예술의 모습을 띤다. 그래서 음악은 또한 익숙한 일상의 시간을 낯설게 만드는 예술이며, 시나위 속에서 디오니소스를 발견하게 되는 이질적 계기 또한 이러한 음악의 성격에서 기인한다.
원일이 일찍이 시나위를 “신아위(神我爲)”라는 한자 조어를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그 우주/세계 만물(神)-인식/행위 주체(我)-연주 실천/행위(爲)의 음악적 ‘삼위일체’를 강조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나위는 무악에서 출발했으나 지금 바로 여기서 갱신되는 시나위의 정신은 단순히 특정한 종교를 넘어서 인간 경험 일반 속 무(巫/無)의 감각/인식의 발현과 그 실천이라는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체험을 현대적으로 재현하고 창출하는 것이다. 무릇 모든 음악의 내적 경험이 그러하듯이. 그러므로 음악은 현재였으나 또한 과거이며 다시 미래였으나 바로 지금의 순간 그 자체이다.
이렇게 본다면 일견 ‘시나위 오케스트라’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으로 읽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극도의 즉흥성과 최고의 우연성과 최전선의 현장성이 발휘되는 연주 구성과 방법을 의미하는 ‘시나위’ 형식이, 일견 미리 완성된 정해진 작곡 작품을 충실히 재현하는 작업을 최우선으로 삼는 관현악단(오케스트라)이라는 형식과 서로 모순적 충돌을 일으키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원일은 일찍이 이러한 모순이 지닌 근본적인 의미를 ‘시나위’라는 개념과 실천에 대한 사유와 확장을 통해 끈질기게 모색해 왔으며, 국립국악관현악단과 경기시나위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역임하면서 이러한 음악적 문제의식을 다양한 스펙트럼을 통해 활발하게 실험해 왔다. 그가 서양의 오케스트라 구성과 국악의 음악적 형태 사이의 모순과 충돌을 적극적으로 돌파하고자 힘써옴과 동시에 더 나아가 ‘국악’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닌 제한성과 확장성, ‘시나위’라는 기존 형식의 현재적 가능성과 미래적 불가능성에 천착해왔던 것은, 어쩌면 음악이 지닌 종교적이며 철학적인 성격을 어떻게 예술이란 시공간 안에서 형상화할 것인가 하는 이 근본적인 추동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디오니소스 로봇>은 하나의 공감각적 제의(rituel)임과 동시에, 이 시대에 다시금 비재현적이고 비가역적으로 재현되고 반복되어야 하는 다면적인 굿의 형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하나의 사건(événement)이다.
시나위/디오니소스의 음악은 자연의 부자연스러움, 코스모스의 카오스를 드러낸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로봇>은 우리가 흔히 ‘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곤 하는 음악의 ‘비(非)자연성’을 드러내며 들리는 것 자체를 시각화하고 보이는 것 자체를 청각화한다. 단지 소리만이 시나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영상과 육체적 움직임 모두가 시나위의 가락이자 장단이 됨을 이상으로 삼는 공연. 다시 말해, 단지 청각적인 것만이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것과 촉각적인 것마저 소리로 들리게 하는 제의, 더 나아가 우리가 미처 감각하지 못하는 것들을 감각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굿,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리는 가락으로 만들고 보이지 않았던 형체를 보이는 장단으로 만드는 초혼(招魂)의 의식. 갱신된 시나위의 디오니소스적 초상이 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음악의 의지이다.
음악이 ‘자연스러운 것의 비자연성’을 드러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러나 그 전에, 과연 ‘자연스러운 음악’이란 무엇인가. 아무런 제한 없이 가락과 장단을 펼치면서 동시에 무화시키는 어떤 ‘자연’, 우리는 그것을 흔히 음악이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러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음악은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무엇이기에, 음악에는 구성적 제한이 따르고 그에 맞는 언어와 문법이 존재한다. 물론 그 틀이 고착화되면 그것은 마치 로봇과도 같은 딱딱함과 답답함으로 인식되지만, 반대로 그러한 고체의 틀이 없는 자유는 그저 ‘부자연스러운’ 방종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시나위 정신이 디오니소스와 만나게 되는 진정한 접점의 문제의식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폴론적 정주(定住)의 질서와 체계를 완전히 배제하고 뒤엎는 디오니소스적 탈주의 파괴와 해방은 그 자체로서는 어쩌면 그저 자유가 아닌 혼돈일 뿐이다.
카라바조(Caravaggio)가 그린 디오니소스의 오묘한 모습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진정한 자연스러움은 역설적이게도,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 안에 머물면서 동시에 그 자연을 거스르는 어떤 비자연적 의지로부터, 그리고 그렇게 우리가 자연스러움이라고 익숙하게 생각했던 것의 비자연성을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다시 낯설게 똑같은 자연스러움으로 되돌아오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으로부터 발생하는 무엇이다. 시나위 또한 모든 연주자들이 하나의 몸이 된 몰아(沒我)의 통일적 상태에서 펼치는 통일되지 않은 흩어짐이 아니고서는 그저 ‘소음’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이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오가는 예술의 변증법, 그 사이‐경계 위에서 최대의 비자연성과 부자연스러움을 가장 ‘자유롭게’ 노니는 탈구성적 구성의 음악적 유희인 것이다.
이는, 가장 단순하게는 음악적 절제와 자유 사이, 예술적 형식과 그 탈피 사이, 작품의 구성적 치밀함과 그 파괴의 해방적 자유로움 사이를 오가는 일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세계의 질서와 무질서 사이, 구조/체계의 수축과 이탈/혼돈의 이완 사이, ‘나’인 것의 동질성과 ‘나’ 아닌 것의 이질성 사이에서 종횡무진 현기증 나는 끝없는 줄타기라는 예술‐존재론적 문제의 가장 첨예한 핵심을 환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디오니소스의 제의가 된 시나위 속에서, 울고 웃고 읊조리고 내지르는 강권순의 목소리, 아우르고 감싸 안는 동시에 돌출하고 찢어버리는 즉흥의 앙상블, 서로 다른 시간성을 ‘공유’하듯 ‘분유’하면서 중첩과 동시에 상쟁을 드러내는 관악기들, 시간에 공간의 부피를 부여하고 공간에 다시 시간의 질감을 부여하는 양금과 타악기들, 질서 속 무질서의 통주저음과 고음이 서로 다른 둘이 아님을 드러내는 거문고와 가야금, 이 모두를 조율하듯 품어 안으면서 동시에 그 모두를 분쇄하듯 흐트러뜨리는 바이올린과 기타와 베이스와 전자 음향, 다시금 그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신이 또 하나의 소리가 되고 침묵이 되는 시각적 영상의 음파(音波), 이 모든 것은 구성 속의 즉흥, 필연 속의 우연, 질서 속의 무질서, 코스모스 속의 카오스를 드러내는 의식의 주체이자 객체가 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특히 <디오니소스 로봇>의 무대가 보여주는 분할되지 않은 분할과 구성을 벗어나려는 구성에 주목해야 한다. 청각이 시각을 설명하는 부속품으로 종속되지 않고 또한 음악이 시각적 몸짓을 따라가는 반주곡으로 귀속되지 않게 ‘보이게’ 하는 구성이 바로 그것. 음악은 영상을 반주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상 역시 음악을 설명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음악은 그 자신의 기존하는 음악성을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하나의 유일무이한 반복될 수 없는 반복의 새로운 음악으로 태어나고 사라진다. 시각 또한 그 자신의 시각성을 배타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소리가 됨으로써 거꾸로 그 자신의 비가시적인 시각성을 획득한다. 들을 수 없는 몸짓 역시 그 소리들 사이를 헤집고 흔적을 내고 길을 터 그 잔상과 족적이 남기는 소리를 만들어냄으로써 비로소 하나의 움직임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의 중심을 갖지 않고 모든 것을 주변으로 만들면서 다시금 그 주변적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중심으로 드러내는 무대의 구성은 그 자체로 또 다른 시나위적 소리가 된다. 그래서 시나위‐하기란 중심도 없고 주변도 없는 디오니소스를 음악적 순간 속에서 불러내어 바로 그 찰나의 시간 속에서 영원과 조우하려는 (불)가능의 의식에 다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