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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스타 남편…가정폭력 사실 드러나자 '충격'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미국의 '국민 화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3만명 '대기록' 세웠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서울시립미술관에서 33만명 '대기록' 세웠던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호퍼의 그림에는 보는 이의 마음을 조용히 흔드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영화처럼 스타일리시합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한국에서도 호퍼의 인기는 하늘을 찌릅니다. 2년 전인 202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는 대표작이 많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33만명에 달하는 관람객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세상을 떠난 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95년, 어느 미국의 미술사학자가 낸 책 한 권이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에드워드 호퍼 : 친밀한 전기>라는 이 책에서 휘트니미술관 큐레이터였던 게일 레빈은 호퍼의 아내가 남긴 일기를 통해 그의 진면목을 샅샅이 파헤쳤습니다. 책을 읽은 사람들은, 그동안 했던 상상과 실제 호퍼의 삶이 꽤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가장 많이 나왔던 반응은 “환상이 깨졌다”였지요. 어땠길래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요. 오늘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에서 소개합니다.
소심하고 외로운 남자
호퍼의 실제 성격은 널리 알려진 ‘남성적이고 쿨한 도시 남자’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반대로 수줍음이 많고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성격은 유년기부터 형성됐습니다.1882년 뉴욕 근교의 한 마을(나이액)에서 태어난 호퍼는 어린 시절부터 기가 센 어머니와 누나들에 눌려 살았습니다.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게 자란 키는 자랑이 아니라 콤플렉스일 뿐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내성적이었던 호퍼는 학창 시절 ‘꺽다리’라 놀림을 받으며 수줍음을 많이 타는 성격을 갖게 됐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대신 호퍼는 혼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발견할 수 있었지만요.
1900년 뉴욕 예술학교에 입학한 호퍼는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만난 학교 선생님(로버트 헨리)은 “예술가는 주변에서 소재를 찾고, 예술을 통해 자신을 표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호퍼에게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삶을 해석하고 표현한 것”이라는 신념을 심어 줬습니다. 쉽게 말해 예술가는 남의 얘기를 거창하게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을 통해 겪고 깨달은 얘기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이런 식으로 호퍼는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하나씩 천천히 마련해 나갔습니다. 예컨대 20대의 호퍼는 세 차례에 걸쳐 당시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며 드가와 마네의 그림에 깊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들의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은 왠지 말 못할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이를 통해 호퍼는 화면 구성과 연출을 통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법을 배웠지요. 호퍼 그림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핵심 요소인 ‘빛의 효과’도 여기서 시작된 겁니다.
이 실패를 계기로 호퍼는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사실적인 장면을 그리게 됩니다. 그가 표현하려는 주제도 좀 더 미묘하게, 예를 들면 빛의 각도나 건물의 모습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으로 깊이 숨겨 놓게 됐지요. 훗날 그린 ‘자동판매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밤 시간대의 평범한 식당을 그린 것 같지만 분위기는 외롭고 쓸쓸합니다. 바깥의 풍경을 전혀 비추지 않고 실내 조명만 거울처럼 반사하는 창문, 여성의 내리깐 시선, 맞은편의 빈 의자, 장갑을 낀 왼손의 검은색과 오른손의 창백한 흰 피부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같은 것들 덕분에 여성의 고립이라는 주제가 완성됩니다.
이 기나긴 무명의 터널을 지나던 시기, 그는 뉴욕 예술학교 동창 한 명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됩니다. 동료 화가였던 조세핀 니비슨(조, 1883~1968)이었습니다. 예술학교 시절엔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지만, 다시 만났을 때 호퍼는 조를 마음에 두게 됐습니다. 하지만 수줍은 성격 탓에 쉽게 말을 걸지 못했지요. 며칠을 끙끙 앓던 그가 겨우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건넨 ‘작업 멘트’는 이랬습니다. “어제 당신이 데리고 산책하던 고양이를 봤어요. 예쁘던데요.”
호퍼, 빛을 그리다
놀랍게도 고양이 얘기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수줍음 많은 마흔한 살 꺽다리 호퍼, 자그마한 체구에 활발한 성격의 마흔 살 조는 1923년 연인이 됐습니다. 둘은 서로에게 급속도로 끌렸습니다. 문화적 코드도 딱 맞았습니다. 어느 날 호퍼가 프랑스어 시인의 시를 원어로 읊다가 잠깐 멈추자, 조는 그가 멈춘 구절의 다음 부분을 완벽하게 이어 읊었다고 합니다. ‘이 여자와 결혼해야겠어.’ 그 때 아마도 호퍼는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40대 무명 화가 호퍼가 날개를 편 것도 조와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수채화가로 활동하던 조는 그 해 브루클린 미술관의 단체전에 초대받았는데, 이때 큐레이터에게 “호퍼의 작품을 함께 전시해 달라”고 강력하게 권유했습니다. “그래요? 호퍼는 상업 삽화를 그리는 사람 아니었나요?” 큐레이터는 미심쩍어하면서도 조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열린 전시회에서 호퍼의 작품은 극찬을 받았고, 미술관은 작품 한 점을 구입했습니다.
이듬해인 1924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조와의 결혼은 호퍼에게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해줬습니다. 조는 그의 유일한 모델이자 열렬한 지지자였고, 때로는 냉철한 조언자였습니다. 그녀의 헌신 덕분에 호퍼는 새로운 예술적 경지에 도달합니다. 단순한 ‘조명’에 불과했던 그림 속 빛을, 감정을 증폭시키고 서사를 부여하는 ‘주연 배우’로 활용하기 시작한 겁니다.
특유의 매력적인 화풍이 입소문을 타면서 호퍼의 존재감은 급격히 커졌습니다. 1931년 호퍼는 총 30점의 그림을 판매해 8728달러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지금 가치로 2억원이 넘는 거액입니다. 이 모든 성공은 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속 여성들은 모두 조가 기꺼이 모델을 서준 결과물이었고, ‘나이트호크’ 같은 의미심장하고 멋진 제목들 중 상당수도 조가 붙여준 것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그림의 등장인물과 연출에 대해서도 서로 상의했습니다. 한 마디로 호퍼의 작품은 두 사람의 재능과 노력이 합쳐진 결과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둘의 관계에는 의외의 면도 있었습니다.
사랑과 전쟁
부부가 살다 보면 싸울 때도 있기 마련입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자주 싸우느냐는 부부마다 천차만별입니다. 호퍼와 조는 엄청나게 자주 격렬하게 싸우는 편이었습니다.
다만 조의 반응이 좀 과한 면도 있었습니다. 1938년 있었던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당시 호퍼는 버지니아 미술관 전시에 출품할 작품을 고르는 심사위원회의 위원장이었습니다. 조는 이 심사에 자신의 그림을 출품했는데, 작품이 탈락하자 격분해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이 작품은 내 아내의 작품이야’라고 한마디만 해주지. 이 더러운 개자식. 절대 잊지 않을 거야. 절대로.” 섭섭한 감정이 들 수는 있어도, 공정성 차원에서 보면 호퍼의 행동은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조의 작품이 정말 좋았다면 호퍼의 언질 없이도 심사에 합격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두 사람의 싸움은 단순한 신경전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둘은 격렬한 육탄전을 벌이곤 했습니다. “나는 뺨을 한 대 세게 맞았다. 그의 얼굴에는 두 군데 긁힌 자국이 길게 났다.” 육체적인 조건은 호퍼가 압도적이었지만 조도 기세에서 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일기 곳곳에는 남편을 물어뜯었다는 얘기가 기록돼 있습니다.
재미있는 건 호퍼 부부가 이런 사생활을 철저히 남들에게 숨겼다는 사실입니다. 호퍼의 철학은 ‘작품은 삶에서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 속 남자가 인간의 근원적 고독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 잠겨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아내와 싸우고 분노에 넋을 놓고 있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의심하게 된다면…. 작품에 대한 ‘신화’가 깨질 것이라고, 호퍼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호퍼는 자신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조도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이들의 사생활을 알 수 있게 된 건, 조의 은밀한 일기장이 뜻하지 않게 남겨져 연구된 덕분입니다.
두 명의 코미디언
두 사람의 격렬한 싸움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잦아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면서 호퍼와 조는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됐습니다. 호퍼는 자신의 작품세계와 커리어가 조의 헌신적인 도움과 희생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욱 깊이 그녀에게 의지했습니다. 조 역시 자신의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였습니다. 두 사람이 완벽한 ‘한 팀’이 된 겁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두 사람이 만난 지도 40년이 넘었습니다. 호퍼는 83세이던 1965년, 자신의 끝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하고 마지막 작품을 그립니다. 제목은 ‘두 코미디언’. 그림 속 어두운 무대 위에서 하얀 옷을 입은 남성과 여성은 손을 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호퍼와 조를 상징합니다. 자기 작품과 예술세계가 모두 조 덕분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담은 공개적인 고백이자 고마움의 표시.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와 영광을 반드시 함께 나눠야 할 파트너가 조라는 뜻이었습니다. 호퍼는 조카에게 작품의 이런 의미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좀처럼 작품에 대한 말을 하지 않는 호퍼로서는 이례적입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조는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호퍼와 함께한 삶은 완벽했다.” 조가 말한 ‘완벽함’은 아무 흠이나 다툼이 없는, 고요하고 이상적인 상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두 사람의 좋고 나쁜 감정, 심지어 좌절감과 비통함, 긴장, 격렬한 싸움과 영원한 이별의 경험까지 관계의 그 모든 국면을 합친 삶이 완벽했다는 의미입니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갈등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게 아니라, 바로 그 갈등 때문에 완전할 수 있었다는 게 조의 회고였습니다. 그렇듯 조는 지나간 모든 시간을 사랑하며 소중히 끌어안았습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요. 어쩌면 진정한 고독이란 시험을 망치고 집에 돌아오며 보는 도시의 풍경, 배우자와 다투고 홀로 카페에 앉아있을 때, 힘든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대중교통 안에서 넋이 나가 있을 때처럼, 지극히 사소하고 때로는 구질구질한 삶의 순간들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멋진 ‘쿨함’이나 장황한 철학이 아닌, 격렬한 사랑과 전쟁에서 나온 그의 그림이 사람들의 깊은 공감을 끌어내는 이유입니다. 호퍼의 말처럼 결국 ‘작품은 곧 그 사람’이고, 조의 말처럼 좌충우돌하는 삶과 관계 그 자체가 ‘완벽한’ 것이니까요.
***칼럼을 바탕으로 출간한 책 중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이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선정한 올해의 양서인 ‘세종도서’에 선정됐습니다. 독자 여러분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