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소리, 고운 소리. 김봄소리

김봄소리의 바이올린 연주를 처음 접한 것은 앨범 <비에냐프스키/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Wieniawski/Shostakovich: Violin Concertos)>을 통해서다. 워너 뮤직에서 근무하던 시절, 클래식 음악 부서의 팀장님께서 “정경화 선생님을 이어갈 차세대 유망주야.”라는 멘트와 함께 나에게 앨범을 건넸던 기억이 있다. 당시 그의 연주는 힐러리 한(Hilary Hahn)의 모범생적인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Shostakovitch: Violin Concerto No. 1, Op 77)>에 비해 자유분방하고, 명랑했다.

이후 김봄소리가 앨범에서, 무대에서 ‘성장’과 ‘변화’의 꽃을 피워 나갈 때마다 위대한 음악가의 타임라인을 공유하는 행복감을 느꼈다.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한 아시아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순간. 앨범 <바이올린 온 스테이지(Violin On Stage)>과 <닐센: 바이올린 협주곡(Nielsen: Violin Concerto)>에서 오래 간직하고 싶은 맑고, 고운 소리를 들려준 기억. 어느덧 김봄소리는 선명한 색감과 다채로운 감정을 이끌어내는 음악가로 세계 무대를 종횡무진하고 있었다.
김봄소리. / 사진 제공. 유니버설뮤직
김봄소리. / 사진 제공. 유니버설뮤직
숨소리조차 음악으로 승화시킨 앨범

지난 5월 김봄소리는 야쿠프 흐루샤(Jakub Hrůša)가 지휘하는 밤베르크 심포니(Bamberg Symphony)와 함께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Violin Concerto No.1 in G minor Op.26)’과 ‘코른골트 바이올린 협주곡(Violin Concerto in D minor Op.35)’, 그리고 바이올린으로 편곡한 코른골트의 <침묵의 도시>, <헛소동>, <조용한 세레나데> 등을 앨범으로 발표했고 2장의 LP에 담았다.

스승인 김영욱이 1972년 밤베르크 심포니와 협연한 <브루흐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앨범을 듣고, 이 음반 작업을 꿈꿔왔다는 김봄소리는 자신만의 해석을 곁들여 생동감 있는 연주를 선보였다. 특히 이번 앨범은 소리가 모든 방향에서 들리는 공간 음향 기술을 적용하였고, 독일의 옵티멀 프레스 과정을 거친 LP에 담겨 풍부한 소리 구현력으로 청자의 귀를 사로잡는다. 연주자의 숨소리조차 음악의 일부분으로 승화시켜 현장감을 더한 것도 인상적이다.

브루흐가 자신의 친구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제프 요하임(Joseph Joachim)’에게 헌정한 이 곡은 심장을 파고드는 서글픈 정서가 지배적인 곡이다. 연주자마다 이 정서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법이 다양한데, 김봄소리는 ‘슬픔’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대화하듯 연주했다.

1악장(Vorspiel: Allegro moderato)의 서두에서 그는 오래된 비밀을 끌어내듯 은밀하게 음표에 다가선다. 정경화(루돌프 캠페/로열 필하모닉, 1982년)가 이 부분을 몰아치듯 강렬하게, 이자크 펄만(앙드레 프레빈/런던 심포니, 1973)이 침전하듯 중후하게 연주한 것과는 다른 접근법이었다. 특히 중반부에 슬픔을 눌러 담아내듯 연주한 더블스톱은 곡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줬고, 각 음 사이에 포르타멘토는 최소화해 조용히 슬픔을 다독이는 듯했다.

2악장(Adagio)에서 그는 수면 아래에 침전된 감정들을 하나둘씩 조심스럽게 끌어 올리듯 연주했다. 바이올린이 이끄는 빼어난 선율들이 악장을 우아한 슬픔으로 치장시키고, 음 하나하나가 잘게 파문을 일으키며 긴 여운을 남겼다. 화려한 기교와 아름다운 선율이 인상적인 3악장(Finale: Allegro energico)에서 김봄소리는 서정적인 리듬감을 살려 협주곡 전반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한껏 슬픔은 아름다워지고, 음악은 사랑이 되는 순간을 표현한 듯했다.
김봄소리의 ‘브루흐/코른골드’ 앨범. / 사진 제공. 유니버설뮤직
김봄소리의 ‘브루흐/코른골드’ 앨범. / 사진 제공. 유니버설뮤직
‘판타지 소설’ 여행하는 듯한 연주

<코른골트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김봄소리와 야쿠프 흐루샤/밤베르크 심포니는 판타지 동화 속을 여행하듯 연주했다. 1악장(Moderato nobile)의 멜로디 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오즈의 마법사>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김봄소리는 하모닉스와 높은 포지션의 비브라토를 사용해 음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관현악기들은 소리에 응수하며 신비로움 더했다.

2악장(Romance: Andante)은 LP 음색의 따뜻한 질감과 특히 잘 맞닿아 있다. 김봄소리는 음표들이 마치 빛의 결정처럼 반짝이게 연주하는데, 트릴과 하모닉스, 미세한 포르타멘토로 곡의 맛과 멋을 동시에 내는 노련함도 돋보인다. 리듬과 음에 상상력을 불어넣듯 연주한 3악장(Finale: Allegro assai vivace)은 음악의 무한한 잠재성을 경험하게 한다. 화려하고 열정적인 선율은 감정선을 한껏 끌어올리면서 곡의 마침표를 찍는다.

슬픔과 환상을 잇는 앨범

앨범은 전반적으로 두 문학 장르(서정시-브루흐/판타지 소설-코른골트)가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 김봄소리는 성격이 다른 음악들을 자신만의 느낌으로 써 내려가면서 낭만주의의 독자적인 서사를 완성시킨다. 슬픔과 판타지를 선율로 이은 김봄소리의 아름다운 연주는 마지막에 이르러 잔향을 남기는 문장이 된다.

두 바이올린 협주곡과 함께 수록된 코른골트의 오페라 <죽음의 도시> 중 ‘마리에타의 노래’와 오페라 <조용한 세레나데> 중 ‘아름다운 밤’/‘그대 없이’, 그리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헛소동 모음곡> 중 ‘정원에서의 장면’ 등도 함께 감상하면, 가을 분위기를 흠뻑 젖을 수 있을 것이다.
위 사진과 같은 앨범. / 사진. ⓒ 이진섭
위 사진과 같은 앨범. / 사진. ⓒ 이진섭
이진섭 칼럼니스트•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