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팔레에서 열린 럭셔리 브랜드 협회 코미테 콜베르 행사
<럭셔리의 두 손(Les Deux Mains du Luxe)>
'장인정신'이 다시 산업 전략이 되다
그랑 팔레, 거대한 공방으로 변신하다
파리 패션위크 기간인 지난 10월 2일부터 5일, 대규모 보수 공사를 마친 그랑 팔레(Grand Palais)가 럭셔리 산업의 거대한 공방으로 탈바꿈했다. 샤넬, 에르메스, 루이 비통 등 프랑스 32개 럭셔리 메종의 장인들이 2,500㎡ 공간에 총집결했다. 금속을 세공하고 정교하게 자수를 수놓는 장인들의 손길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럭셔리의 두 손(Les Deux Mains du Luxe)'. 행사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경기 침체와 중산층 소비 둔화로 어려움을 겪는 럭셔리 업계가 선택한 해법은 최신 기술이 아닌, 가장 오래된 가치인 장인정신(Savoir-faire)이었다. 산업의 중심축을 담당하는 장인 기술 전수 위기에 업계와 정부가 함께 나섰다.
행사를 주최한 코미테 콜베르(Comité Colbert)는 1954년 향수 제작자 장 자크 겔랑이 설립한 럭셔리 브랜드 협회다. 협회명은 17세기 루이 14세의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에서 따왔다. 콜베르는 프랑스 럭셔리 산업을 육성해 세계에 알렸고, 중상주의 정책으로 프랑스를 강대국 반열에 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현재 코미테 콜베르의 회원사는 총 121곳으로 97개 럭셔리 브랜드와 베르사유 궁전, 에펠탑 등 문화 기관 18곳을 포함한다. 협회는 일반적인 업계 단체와는 다르다. 프랑스 정부와 협력해 럭셔리 산업을 국가 전략 차원에서 육성한다. 민간 협회가 공공 문화기관과 함께 산업 보호부터 인재 양성, 문화 외교까지 담당하는 구조. 프랑스 럭셔리 생태계만의 특징이다.
프랑스 럭셔리가 최고로 인정받는 이유는 가격 때문이 아니다. 그 안에 녹아 있는 프랑스 라이프스타일 '아흐 드 비브르(Art de Vivre)' 가 큰 역할을 한다. 이는 일상 속에서 지나치기 쉬운 작은 디테일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말한다. 품격 있는 미적 감각으로 일상을 채우는 프랑스인들의 삶. 삶을 우아하게 누리는 럭셔리의 핵심을 실제로 구현하는 것이 바로 장인들의 뛰어난 손길이다.
그러나 위기가 닥쳤다. 코미테 콜베르 조사 결과, 프랑스 문화유산 공예 장인 중 25%가 55세 이상으로,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숙련 기술을 물려줄 사람이 끊길 위기는 경제적 손실뿐 아니라 프랑스 문화유산의 단절 위기로 인식된다.
코미테 콜베르의 미션은 프랑스 장인 정신을 널리 알리고, 장인 기술을 지속 가능하게 전수하는 것이다. 이번 행사는 ‘행동이 곧 사고(Doing is thinking)’라는 모토 아래 장인정신에 내재된 미적, 창조적 지성의 가치를 조명하고 젊은 세대의 관심과 진로 유치에 전력을 기울였다.
32개 럭셔리 하우스는 7개 분야로 나뉘어 참여형 워크숍과 라이브 시연을 제공했다. 주요 테마는 식기 및 테이블웨어(Art de la table), 실내 장식, 미식 및 호스피탈리티, 주얼리 및 시계, 패션, 향수 및 화장품이었다. 디올, 반클리프&아펠, 부쉐론, 브레게, 크리스찬 루부탱, 바카라, 크리스토플, 겔랑, 랑콤, 리츠 파리 등이 참가했다.
코미테 콜베르의 베네딕트 에피네 대표는 “이번 행사는 프랑스를 세계에 빛내는 장인 정신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려는 우리 산업의 의지”라며 “그랑 팔레에 이처럼 많은 럭셔리 하우스와 장인, 직업학교가 모인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인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방문객들이 럭셔리 장인이 되어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데 집중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해외 취업을 꿈꾸는 한국 청년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디자이너나 마케팅 분야보다 장인 분야의 인력난이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장인 직업은 전문성과 희소성을 인정받는 분야다. 럭셔리 하우스 공방 취업 혹은 장인 기술 습득을 목표로 유럽의 장인 학교나 직업 훈련 과정을 고려하는 것이 실질적인 기회가 될 수 있다. 쉬운 길은 아니지만, 프랑스 정부와 업계가 인재를 적극적으로 찾는 지금이 적기일지 모른다.
코미테 콜베르의 ‘손’ 프로젝트는 프랑스의 문화 외교 전략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해 11월 중국 상하이에서는 ‘손의 유희(Jeux de Mains)’라는 주제로 비슷한 행사가 열렸다. 프랑스-중국 수교 60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두 행사의 성격에는 차이가 있다. 파리가 내부 인재 육성에 집중했다면, 상하이는 문화 외교의 장이었다. 프랑스 장인과 중국 명장이 기술적 교류를 나누며 장인정신이라는 공통 언어로 협업 및 시연을 펼쳤다. 럭셔리 산업의 경계를 허물고 프랑스의 문화적 가치를 전파하려는 의도가 담겼다.
300년 전 콜베르가 프랑스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며 국가 브랜드를 높였듯, 코미테 콜베르는 장인정신을 매개로 프랑스 문화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여기에는 럭셔리가 곧 국가 정체성을 대변하는 문화 자산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콜베르 정신이 던지는 질문
경기 침체와 인력난에 직면한 프랑스 럭셔리 업계가 선택한 해법은 ‘콜베르 정신’을 바탕으로 가치를 지키고 인재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번 행사는 기업의 적극적 참여에 더해 파리시와 공공 교육기관까지 참여하는 민관 협력의 결과물이다.
프랑스는 장인 정신을 문화 외교의 도구로 활용한다. 상하이 행사가 보여주듯, 럭셔리는 제품이기 이전에 프랑스의 가치와 정체성을 전파하는 수단이다. 300년 전 콜베르가 설계한 국가 전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K-뷰티, K-푸드, K-콘텐츠의 성공 이면에도 장인의 손이 있다. 그 손을 어떻게 지키고 키울 것인가. 프랑스가 보여준 장기적 안목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