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는 ‘열매가 너무 많이 달린 사과나무’라고 불린다. 600여 곡의 방대한 작품을 장르별로 고루 남겼으나 각인 효과가 크지 않은 이유다. 200곡 남짓에 그나마 피아노곡이 대부분인 쇼팽의 대중적 성과와 흔히 비교된다. 생상스는 그래도 분명 천재와 신동이었다. 음악·과학·문학 등 다방면에서 탁월했으며, ‘프랑스 음악의 고전적 기둥’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형식 감각과 정신적 절제를 보여준 음악가이자 예술가였다. 오페라는 모두 13개의 작품을 남겼는데 그중 <삼손과 데릴라>가 특히 유명하다. 1877년, 42세 때 음악적으로 원숙한 시대에 나온 걸작이다. 프랑스어 원제목이 ‘Samson et Dalila’. ‘상송과 달릴라’라고 표기해야 옳지만, 관용을 따른다.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1835~1921)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줄거리는 잘 알려져 있다. 배경은 오늘날에도 분쟁지역인 가자(Gaza) 땅. 지혜를 갖춘 히브리인 용사(勇士) 삼손은 불구대천 원수지간인 블레셋(팔레스타인)인에게 있어 난공불락의 존재다. 그가 이끄는 전투에서 블레셋은 어김없이 패퇴하기 일쑤. 어떻게든 삼손을 처단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결국 미인계를 동원하는데 블레셋 여인들은 예부터 아름다운 외모로 회자됐었다. 그중 데릴라는 단연 으뜸이었고 대담함까지 겸비했던 것. 데릴라는 삼손을 향해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고, 결국 힘의 원천은 머리카락에 있다는 걸 밝혀낸다. 삼손은 블레셋 병사에게 잡혀 눈까지 뽑히는 수모를 겪는다. 온갖 형벌로 지쳐가던 어느 날, 능욕 끝에 축제 공간으로 변한 블레셋 신전에 끌려온 삼손. 며칠 동안 자란 머리칼에 희망을 품고 신께 간절히 기도한 그는 마침내 큰 기둥을 넘어뜨리며 운집한 블레셋인들을 몰살시킨다.
데릴라가 삼손의 머리카락을 베어 움켜준 모습 / 사진출처. 독일 위키피디아
‘그대 음성에 내 마음이 열리고(Mon coeur s'ouvre à ta voix)'라는 빼어난 아리아가 2막에 나온다. 이 노래가 바로 데릴라가 삼손을 본격 유혹하는 시발점이다. 부드럽고 섬세하며, 관능적이고 매혹적이다. 프랑스 아리아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메조소프라노의 대표 아리아다.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의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그대 음성에 내 마음이 열려요 / 새벽의 키스를 받고 꽃잎이 열리는 것처럼 / 내 사랑이여, 내 눈물을 닦을 수 있게 당신 음성을 한 번 더 들려주세요 / 이 데릴라와 영원히 함께 있겠다고 약속해 줘요 / 아, 내 사랑에 응답해 줘요 / 나를 황홀하게 만들어주세요 / 밀 이삭이 산들바람에 일렁이듯 / 사랑스러운 그대 음성에 위로받고 싶은 내 마음은 떨려요 / 죽음을 실어 나르는 화살보다 더 빠르게 당신 품속으로 파고들게요 / 아, 내 사랑에 응답해 주세요 / 나를 황홀하게 만들어주세요”
이 노래 역시 마리아 칼라스의 호소력과 카리스마가 우뚝하지만, 최근 부쩍 부상한 디바 엘리나 가란차(1976~ )도 잘 불렀다. 발트 3국 중 하나인 라트비아 리가 태생. 탁월한 음악성, 풍성한 음색, 그리고 특유의 임장감(臨場感)으로 유명하다. 어떤 장소나 상황에 실제로 있는 듯한 느낌이 임장감이다. 영어로는 sense of presence, 즉 배역에 대한 몰입도가 상당히 높다. 특히 DG(도이치 그라모폰, Deutsche Grammophon)와의 전속 계약 후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발표하며 성가(聲價)를 높이고 있다.
이 시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중 한 사람 엘리나 가란차 / 사진출처. 독일 위키피디아
2012년 더 텔레그래프가 '발성·음색·아티스트십·카리스마를 모두 갖춘 메조소프라노'라고 호평한 이래, 가디언은 '관능적인 매력과 더불어 품위와 재치가 있으며 유연하고 음역이 넓다'고 극찬했다. '21세기 들어 가장 강한 인상을 풍기는 프리마 돈나'는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지의 추앙에 가까운 평이다.
가란차의 모국 라트비아는 한반도의 3분의 1 크기에 인구는 2백만이 조금 안 된다. 1인당 소득은 2만 4천 달러 수준의 중소국이다. 그러나 클래식 음악에서는 굵직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다. 우선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Maris Jansons, 1943-2019)가 있다. 카라얀 지휘 콩쿠르 우승에 빛나며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암스테르담 로열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 상임을 거쳤다. 현재 최상위권인 마에스트로 안드리스 넬손스(Andris Nelsons, 1978~)도 있다. 보스턴 심포니⸱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악단의 음악감독이다. 명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Gidon Kremer, 1947~ )와 한국을 20번 넘게 찾은 첼로 거장 미샤 마이스키(Mischa Maisky, 1948~ )도 라트비아 출신이다.